큰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크게 넘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믿음을 지탱해 주는 작고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엘리야는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승리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장 깊은 절망을 경험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엘리야를 통해서 위대한 믿음의 영웅에게도 깊은 절망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웅들의 성공담보다는 영웅들이 경험한 실패와 좌절를 우리에게 숨김없이 보여줍니다. 이러한 이유에서도 성경은 믿을 수 있는 책입니다. 성경만큼 균형 잡힌 정직한 책은 없습니다.
담대함과 두려움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위대한 승리를 경험한 이후 절망의 계곡에 빠집니다. 엘리야는 승리할 때는 담대했지만 좌절했을 때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담대하던 엘리야가 무엇 때문에 깊은 절망을 경험하게 되었을까요. “아합은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한 모든 일과 엘리야가 모든 예언자들을 칼로 죽였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사람을 보내 말했습니다. “만약 내일 이맘때까지 내가 네 목숨을 죽은 예언자들 가운데 하나의 목숨처럼 되게 하지 못하면 내가 우리 신들에게서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1~2절). 이세벨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리석고 악한 왕이었던 아합의 아내입니다. 이세벨은 아합 왕의 뒤에 숨어서 나라를 통치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아합왕에게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선지자들이 엘리야에 의해서 패배하고 죽임을 당한 이야기를 들은 이사벨은 화를 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엘리야를 처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여인입니까. 이 소식을 들은 엘리야는 겁을 먹고 도망을 갔습니다. “엘리야는 이 상황을 보고 목숨을 지키려고 일어나 도망쳤습니다. 그는 유다의 브엘세바에 이르자 자기 종을 거기에 남겨 두고 혼자서 하룻길을 가서 광야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이제 이것으로 충분하니 제 목숨을 가져가 주십시오. 저는 저의 조상들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3~4절). 450명의 바알선지자와 대결해서 승리한 엘리야가 여인의 위협을 받고 두려움에 떨면서 이스라엘 경계선 남쪽 경계선까지 도망을 쳤습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승리를 경험한 이후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냇가, 사르밧 과부를 통해 훈련시키고 까마귀를 통해서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소생시키는 믿음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 엘리야가 이세벨의 위협이 두려워서 브엘세바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급기야 도망을 간 곳에서 그는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간구를 했습니다. 엘리야의 이러한 모습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가 무엇 때문에 모순적인 모습으로 절망에 빠졌는지에 대한 이유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승리를 하고 난 이후 방심을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엘리야가 절망에 빠진 시점이 승리를 경험한 이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승리는 사람을 강하게 만들 것 같지만 영적으로 보면 오히려 약하게 만듭니다. 승리는 우리를 기쁘게 해서 마음의 경계를 느슨하게 만듭니다. 결국 사탄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사탄이 기다리는 시점이 바로 이때입니다. 사람들은 실패했을 때 마음이 가난해지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유익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의 기쁨을 맛 본 이후에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요. 방심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부족함이 없는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성공과 축복을 경험한 이후에 영적위기와 절망이 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도를 분별하는 하나님
고린도전서 10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선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고전 10:12). 위대한 승리가 위대한 실패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모세도 절망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목숨을 거둬달라고 한 적이 있고, 요나도 하나님께 차라리 목숨을 거둬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자신의 목숨을 거둬달라는 기도에 응답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들이 진심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때때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은 기도는 응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분별하십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을 때 드린 기도가 모두 응답되었다면 삶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엉망진창이 되었을 것입니다.
절망에 빠지게 된 이유 엘리야가 정말 죽기를 원했을까요. 아닙니다. 그의 진심은 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진정으로 죽고 싶었다면 무엇 때문에 도망을 갔겠습니까. 엘리야가 이스라엘에서 브엘세바까기 단숨에 도망친 것을 보면 그는 간절히 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엘리야의 말과 행동에서 모순이 나타납니다. 그는 죽고 싶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마음은 죽고 싶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말하는 죽여 달라는 말은 하나님께 실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립니다. 바로 이것이 엘리야가 절망에 빠진 이유입니다. 엘리야가 위기에 빠지게 된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상황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이 상황을 보고 목숨을 지키려고 일어나 도망쳤습니다. 그는 유다의 브엘세바에 이르자 자기 종을 거기에 남겨 두고”(3절).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불신앙은 망원경을 거꾸로 드는 것과 같습니다. 크게 보여야 할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있습니다. 엘리야를 위협하는 것은 이세벨이 아니라 자신의 불신앙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 바라보는 믿음의 눈
보이는 상황만을 바라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의 역사는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을 쫓아가면 얼마나 큰 일이 일어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소돔과 고모라 땅에 들과 물이 넉넉한 것을 보고 그 땅을 선택하느라 소돔과 고모라가 어떻게 멸망하게 될지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을 정탐했던 12명의 정탐꾼들은 헤브론 산지의 자손들이 키가 큰 것을 보고 두려움에 절망했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진 이유는 바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눈을 의지하면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크리스천의 인생은 육신의 눈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믿음의 눈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육신의 눈이 아무리 밝아도 믿음의 눈이 없으면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눈이 밝아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믿음의 눈이 있어야 상황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승리를 한 이후에 자신이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자 실망하고 절망했습니다.
엘리야의 교만함
“혼자서 하룻길을 가서 광야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이제 이것으로 충분하니 제 목숨을 가져가 주십시오. 저는 저의 조상들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4절). 엘리야가 “이제 이것으로 충분하니”라고 말 한 것은 만족한다는 뜻이 아니라 실망감을 표현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 대결에서의 놀라운 승리로 인해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세벨은 여전히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고, 자신이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아무것도 변하지 않자 크게 낙담했습니다. 여러분, 엘리야의 무엇이 문제일까요. 지금 엘리야는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일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계획과 기대에 따라 움직이는 분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지금 잘못된 의식에 빠져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엘리야는 “저는 저의 조상들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조상들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엘리야와 조상들을 비교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엘리야는 갈멜산에서의 승리 이후에 교만해졌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위대해 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바알선지자들을 무너뜨렸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자 하나님께 불평을 하고 자신은 절망에 빠졌습니다.“엘리야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매우 열심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부수며 주의 예언자들을 칼로 죽여서 이제 저만 혼자 남았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이제는 제 목숨까지 빼앗으려 합니다.’”(10절). 이 구절에서 우리는 엘리야가 교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우리의 언어 속에서도 ‘나’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면 그것은 틀림없이 교만해진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귀중했던지 자신의 생각과 기대, 자신의 목숨이 중요하다고만 말합니다. 자신은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이 온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불평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방향을 잘못 잡았습니다. 그가 갈멜산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 자신이 죽을지라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면 내어 드리겠다고 헌신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갈멜산에서 내려온 후 엘리야는 자신의 목숨과 생각, 위치가 하나님보다 중요해졌습니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께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얼굴을 가리시는 하나님
물론 사람의 존재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한 영혼이라도 없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없어야할 존재나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존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잘못한 일을 하나님이 수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방해가 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용하실 뿐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우리가 헌신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능력이 충분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중요하게 생각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잠시 가리십니다. 승리의 원동력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잠시 얼굴을 가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잠시 동안 얼굴을 가리자 엘리야는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엘리야가 깊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이 캄캄한 상황에서 자신을 향한 이세벨의 위협은 더욱 크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전에는 이세벨이 엘리야를 위협하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지금 엘리야의 영적인 시력이 약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 자신을 크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두 단계를 거쳐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회복시키는 하나님
첫 번째 단계로 육신의 회복입니다.
“그리고는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그를 만지며 말했습니다. ‘일어나서 뭘 좀 먹어라.’ 엘리야가 둘러보니 머리맡에 뜨거운 숯으로 구워 낸 빵 한 덩이와 물 한 병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먹고 마시고 난 뒤 다시 누웠습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다시 와서 그를 만지며 말했습니다. “일어나 뭘 좀 먹어라. 네 갈 길이 아직 멀었다”(5~7절). 하나님은 절망에 빠져있는 엘리야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와 요나를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은 절망에 빠져있는 엘리야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책망하지 않고 천사를 통해 먹이고 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베드로를 만나셨을 때 육의 회복을 먼저 시켜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육의 회복만으로는 절망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먹고 마셨습니다. 그 음식으로 기운을 차린 뒤 엘리야는 밤낮으로 40일 동안을 걸어가서 하나님의 산인 호렙 산에 이르렀습니다”(8절). 광야의 로뎀나무에 있던 엘리야가 시내 산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엘리야는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닙니다. 육의 회복만으로는 진정한 영의 회복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엘리야가 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만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산으로 가서 여호와 앞에 서 있어라. 이제 곧 내가 지나가겠다.’ 그러고는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와 여호와 앞에서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바람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지진 속에 계시지도 않았습니다. 지진이 물러간 뒤에는 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불 속에 계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이 지나간 뒤에 작은 소리가 들렸습니다”(11~12절).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세 가지 현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위를 부술 만큼의 강한 바람이 불었지만 그곳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큰 불이 났습니다.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과 지진, 불이 지나간 뒤에 세미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세미한 소리를 통해 엘리야를 찾아왔습니다.
진정한 영웅은 하나님뿐
큰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크게 넘어지고 절망이 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지탱해 주는 것은 작고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친밀하게 하나님과의 교제를 해야지만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크게 쓰인 만큼 절망하고 쓰러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그분을 높여드리십시오. 진정한 영웅은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기자 one@onnuri.org일러스트 박정일 meteojiop@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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