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부활 이후 세 가지 메시지

새벽지기1 2017. 3. 27. 11:23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처음으로 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서가 아니라 사랑했기 때문에,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사랑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을 낳습니다.

 

프롤로그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려 짐승처럼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새 생명을 얻으면서 사람답게 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어느 누구보다 예수님을 잊지 못하고 사랑했습니다.
안식일 다음 날 곧 주일에 해뜨기 직전에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해 보니, 무덤을 막아두었던 돌문이 굴러져 있고, 무덤 안에 예수님의 시신은 없었습니다. 당황한 막달라 마리아는 순간적으로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즉시 그녀는 그 사실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렸고, 두 제자는 허겁지겁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왔지만 예수님을 시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무덤 안에서 발견한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뉘었던 머리 쪽에 개켜 있는 수건과 반대편에 놓인 세마포뿐이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면 머리를 쌌던 수건과 세마포가 가지런히 놓여 있을 리 없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일어나 스스로 벗었다고 하기에도 여러 정황으로 보아 맞지 않습니다. 그 상황을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곧 부활입니다. 마치 누에가 고치를 빠져나가 나방이 되듯이, 예수님께서 수건과 세마포를 빠져나가 부활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할 말을 잃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이 그 자리에 머물게 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떡하든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안을 들여다보고 예수님의 시신이 뉘었던 머리 쪽과 발 쪽에 있는 두 천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천사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베드로와 요한도 보지 못했고, 막달라 마리아도 처음에 보지 못하다가 나중에 보게 된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를 돕는 천사가 교회 안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천사는 우리의 예배를 돕고 기도와 찬양을 도우며 성도들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다만 천사가 어떤 사람의 눈에는 보이고 어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뿐이지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천사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내가 주님의 시신을 찾기 원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막달라 마리아의 눈에 또 다른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동산지기인 줄 알고 ‘누가 주님의 시신을 갖고 간 줄 알면 좀 가르쳐 주세요’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우리가 울며 절망하고 있을 때, 거기에 예수님께서 천사들을 데리고 함께 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예배는 허공을 치게 될 것입니다. 혼자 기도하면 독백이 되고 하소연이 되지만, 예수님께서 함께 해 주시면 천군천사가 우리의 기도를 돕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아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주일 새벽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날에 베드로와 요한은 매우 당황하고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으로 인해 더욱 황당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으며 성령님도 믿지만 때로 방황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모든 것이 제대로 해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신앙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부인할 수도, 기적을 믿을 수도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19~20절 말씀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그날 저녁에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을 닫아걸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곳에 나타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몸이 부활을 전후로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전에 우리와 같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부활 후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문을 닫아걸어도 들어오시고, 홀연히 사라지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마감하고 천국에 갔을 때의 몸 상태가 부활의 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는데도 오셔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몸을 직접 보여주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곳에도 계시고 동시에 세상 어느 곳에도 계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오셔서 매우 독특한 세 가지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첫 번째 메시지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인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불안해합니다. 고통, 위험, 질병, 죽음 등에 대해 항상 불안해합니다. 심지어 아무 탈 없이 모든 것들이 잘 되어 가도 불안해합니다. 인간 자체가 불안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안과 공포를 벗어나 평강을 원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 내가 진정한 평강을 너희에게 주겠다. 이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땅의 평강이 아니라 하늘의 평강이다. 순간적인 평강이 아니라 영원한 평강이다. 너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의 평강이다’고 선언하십니다.


인생에서 고독, 실패, 절망, 저주, 죽음 등으로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평강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강을 주시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주시겠다는 평안은 약속된 것입니다. 그때까지 평강은 실현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평강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예수님께서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죄악, 고통, 질병, 불안, 저주, 죽음 등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근심과 염려와 불안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제 모든 문제들이 깨끗이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불안해하며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곳에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평강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주시는 성취된 평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평강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평강은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불안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그 평강은 실제화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평강은 약속에서 완전한 승리로 변한 것입니다. 완전하고 영원한 평강으로 된 것입니다. 모든 죄악은 용서 받았고 평강이 왔습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를 약속하고, 신약은 오신 메시아를 증거합니다. 우리는 오신 메시아를 찬양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이미 평강은 주어졌고 기도의 응답은 이뤄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모든 것들을 이룰 수 있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불안해하고 평안을 달라고 목마른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미 주어진 평강을 알지 못하고 항상 평강을 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평강을 먹지 않고 주변의 환경을 보면서 평강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미 평강이 주어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고난과 위기와 불안을 능히 이길 수 있는 평강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선포해야 합니다.   
고난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한 번 고난이 지나갔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고난이 찾아오게 됩니다. 인생이 죽을 때까지 고난은 쓰나미처럼 밀려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문제를 피할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문제를 없애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한 가지 문제가 지나면 또 다른 문제가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중요치 않고 문제를 이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태풍이 불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고난, 위기, 불안, 죽음 앞에서도 담대히 맞설 수 있는 평강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겠다고 말씀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다면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문제들이 완전히 해결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온 평강을 선언하면 그 평강이 역사합니다. 21절 말씀을 봅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강조하십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너희를 보내노라”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었으니 가라는 것입니다. 곧 파송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평강이라는 축복이 주어지고 그 뒤에 따르는 것이 파송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곧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제력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곧 의식주를 해결하고 자녀들을 교육시키며 하나님의 일에 헌금하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보면 대체로 악한 사람들이 건강한 것 같습니다. 나쁜 짓을 하라고 건강을 주신 것은 아닐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돈, 명예, 지위, 권력 등을 주신 이유는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얼마 전에 이재규 장로님이 싱가포르 경영대학 부학장으로 발령받고 떠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온누리교회에 와서 7년 된 성도들은 모두 떠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섭섭하기도 하고 떠나지 못해 미안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니, 떠나는 게 아니라 파송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말을 고치기로 했습니다. ‘온누리교회에서 7년 된 성도님들은 파송 받아 가십시오’라고요.
그리스도인의 최대 영광은 파송 받아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난한 곳으로, 병든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좋은 곳, 안락한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이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찾아 떠나가는 것이 주님의 명령에 따르는 일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정을 추구합니다. 이동을 원치 않으며 변화를 거부합니다. 시신은 변화를 거부합니다. 시신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그냥 무덤 안에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움직이고 떠나야 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합니다. 22~23절 말씀을 읽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세 번째 메시지는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을 앞두고 오실 성령님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26절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6장 7~8절에서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소에 성령님에 대해 많이 말씀해 주셨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설명해 줘도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에서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약속하신 성령님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성취된 성령님을 말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이뤄야 합니다. 이미 성령님께서 오셨는데, 우리가 성령 강림을 기도하면 안 됩니다. 이미 오셔서 지금 이곳에 계시는 성령님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오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미 오신 성령님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합니다. 우리는 힘들고 외롭다고 말하지 말고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전도하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선포하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에필로그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신 세 가지 메시지를 배웠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입니다. 이미 평강이 왔고 성령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도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병이 낫고 귀신도 떠나게 됩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생기고 어떤 고난도 이기게 됩니다. 곧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근심하고 염려하며 불안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미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것이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능력이 주님의 종들을 통해
강력하게 나타나소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는 부활의 말씀에
주님을 찬양합니다.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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