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롬10:15)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이와 같이 로마서 10장 15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바로 여칠 전 음력 1월 1일 약 100명 가량 되는 우리 교우들이 모여서 가까운 구역을 대(隊)로 나누어서 전도지를 배부하며 전도를 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일찍이 70인 문도를 불러서 둘씩 대를 지어 여러 성과 촌에 전도를 보낸 일이 있습니다. 며칠 후 이 제자들이 기쁨으로 돌아와서 주님께 여쭙는 말이『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우리들에게 항복하더이다.』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고『귀신이 너희들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고 기뻐할지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도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시간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는 전도자에 대한 축복을 잠깐 생각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고자 하는 바입니다.
첫째로,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힘쓰는 사람은 우선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음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또한 지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년에 기록하신 말씀 가운데『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생명의 면류관이 나를 위하여 하늘에 준비되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려고 하면 우리가 믿음을 지켜야 됩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려고 하면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을 지키는 것보다 오히려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여 나갈 때에 안에도 원수가 있고 밖에도 원수가 많습니다. 나 자신을 싸워서 이겨야 할 때도 많고 밖에 있는 모든 유혹과 시험과 싸워 이여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선한 싸움을 잘 싸워서 내 믿음의 아성을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 최선의 수비를 공격에 있다고 합니다. 내가 단순히 내 믿음을 지키려고만 애쓸 것이 아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악한 마귀의 아성을 공격해서 신앙의 적극적인 생활을 할 때에 자연히 내 믿음은 생각지 아니해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성자라는 이름을 듣던 선다싱의 전기 가운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 번은 인도 지방 히말라야 산맥 남록(南麓)의 산길을 어떤 추운 겨울날 걸어갔습니다. 눈보라가 치고 날은 심히 추운데 눈길을 얼마 걸어가다가 보니까 어떤 사람이 길 가에 넘어져서 죽은 모양입니다. 가만히 들쳐 보니까 손도 발도 얼굴도 아 얼었는데 가슴을 짚어 보니까 아직 온기가 있고 숨도 아직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침 어떤 사람이 길 가로 지나갈 때에 선다싱이 그 사람보고 하는 말이『이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면 아주 얼어 죽어버리겠니 우리 이 사람을 함께 업고서 같이 가봅시다』하였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나도 죽게 되었는데 언제 다른 사람 돌아볼 새가 있습니까?』하면서 그냥 지나갔다고 합니다. 선다싱은 차마 그 사람을 그냥 둘 수 없어서 약한 몸이지만 거의 얼어죽어 가는 사람을 업고 그 눈보라 치는 산길을 걸어서 고개를 넘어가되 몇 번 넘어지면서 그 사람과 그야말로 싸우면서 그 고개를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어죽지 아니하고 그 사람도 힘쓰고 자기도 힘쓰는 가운데 피차에 온기가 나서 두 사람이 겨우 생명을 보존해서 그 산을 거의 다 넘어갔습니다.
거의 다 넘어가다 보니까 어떤 사람이 또 하나 길가에 넘어져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바로 얼마 전에 혼자 살겠다고 먼저 지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힘쓰고 애쓰던 선다싱은 죽어 가는 사람을 구원했을 뿐더러 자기 생명도 구원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죽거나 말거나 자기 혼자 살겠다고 지나가던 사람은 자기 생명도 구원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 생활이 꼭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천성을 향하여 나가는 하늘 길가에는 죽어서 넘어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라도 구원해서 같이 하늘 길을 가려고 애쓴 사람은 그 사람들을 구원할뿐더러 자기도 구원받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죽든지 말든지 나 혼자만 믿고 나가가려다가 얼마 가지 못해서 세상의 무서운 유혹의 바람과 여러 가지 시험에 얼어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고 애쓰면 자연히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여야 되겠습니까? 먼저 나를 위해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여야겠습니다.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도를 전파할 수 있으면 우리의 믿음이 점점 장성합니다. 자라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인도하려고 힘쓰면 자연히 기도도 더하게 됩니다. 자연히 성경을 더 읽게 됩니다. 자연히 모든 일에 조심도 합니다. 자연히 모든 예배의 출석에 게으르지 아니합니다. 기도하고 성경보고 주심하고 게으르지 아니할 때 자연히 우리의 믿음이 자라갑니다.
이런 우스운 말을 들었습니다. 평양의 어떤 분이 담배를 입에 물고 옆의 사람에게 전도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사람이『아, 자네 전도를 하려면 그 담뱃대나 입에서 뽑고 전도하게나.』하고 말하더랍니다. 그이가 계속해서 전도했다고 할 것이면 아마 담뱃대도 뽑은 줄 압니다. 내가 타인을 인도하려고 하면 자연히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히 조심하고 힘쓰고 애쓰는 가운데서 청년들이 운동을 통하여 건강한 육체가 단련되는 것과 같이 우리의 믿음이 단련됩니다. 주님께서 나신 유대 나라에 자그마한 내해(內海)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북방에 있고 하나는 남방에 있습니다. 북방에 있는 바다는 우리가 잘 아는, 우리 주님이 늘 전도하시던 갈릴리 바다올시다. 하나는 좀 더 쑥 내려와서 남방에 있는 사해라고 하는 죽은 바다올시다, 이 두 바다 가 다 한 나라에 있기는 있지만, 두 바다를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천양(天壤)의 차이가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물이 맑습니다. 아름답고 깨끗합니다. 사방으로 산림이 우거졌습니다. 그 바다 속에는 물고기가 많아서 고기를 낚는 어부도 많고 바닷물이 맑아서 배를 띄우고 노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바다올시다. 그렇지만 사해는 같은 유대나라 가운데 있지마는 그 물리 흐리고 빛이 시퍼렇고 썩어져서 냄새가 나고 그 바다 근처에는 나무도 성하지 못하고 그 바다 속에는 고기 한 마리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되는지 아십니까?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두 바다 가 다 요단강 물을 받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는 멀리 헐몬 산상에서 흘러 내려오는 아름다운 물을 받은 다음에는 그 물이 갈릴리 바다에 들어가서 한번 돈 다음에 다시 아래로 내려갑니다. 요단강이 되어서 다시 아래로 내려갑니다. 하지만 이 사해라는 바다는 요단강 물이 내려오는 것을 받기만 하고 다른 곳으로 나가는 출구가 없어서 나가지도 못하고 요단강에 흐르는 물이 다 내려와서는 고이고 고이고 해서 없어지고 맙니다. 갈릴리 바다는 아름다운 강물을 받을뿐더러 아름다운 물을 또한 다른 데로 내어줍니다. 그런고로 물이 아름답고 깨끗하고 그 곳은 고기가 많습니다. 사해는 물을 받기만 하고 남에게 줄 줄 모릅니다. 결과는 썩어져서 죽은 바다 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갈릴리 바다와 같은 신자입니까? 죽은 바다와 같은 신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매일 매일 주시는 은혜로써 우리가 살아갑니다. 이 받은 바 은혜를 감사해서 언제든지 내 이웃에게 이 은혜를 나누어주고 다른 사람에게 이 말씀을 전파하고 도와주는 사람은 갈릴리 바다와 같이 아름답고 깨끗한 신자가 됩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내려오는 은혜를 받고 타인에게는 나누어줄 줄 모르고 자기 혼자만 그냥 간직해 두는 사람은 마지막에 믿음이 썩어져서 죽은 바다와 같은 신자가 됩니다. 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여야 됩니까? 갈릴리 바다와 같은 신자가 되기 위하여, 죽은 바다 가 되지 않기 위하여, 내 신앙이 자라기 위하여 우선 복음을 남에게 전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셋째로는 우리가 타인에게 복음을 전파할 대에 진정으로 우리가 기독교 신자로서 최고의 환희(가장 높은 기쁨)를 맛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농사하는 농부의 가장 큰 기쁨이 어디 있는지 압니까? 이른 봄에 나가서 밭을 갈고 여름 폭양(曝陽)에 뙤약볕 아래서 김을 매는 농부의 생활이 얼른 보기에도 얼마나 수고가 많고 고단한 생활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상 농사를 해본 사람만이 맛보는 기쁨이 거기 있습니다. 가령 밭에 나가 씨를 뿌리고 며칠 후에 나가 보면 봄비가 잔잔히 왔는데 그 뿌린 곳에서 아름다운 새싹이 뾰족 뾰족 나옵니다. 어떻게 보기 좋은지 모릅니다. 그 다음에는 그 싹들이 자라고 자라 점점 올라옵니다. 하룻밤 자고 나가면 또 커졌습니다. 점점 자랍니다. 어떻게 보기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는 이삭이 나옵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는 그 이삭이 다 익어서 고개를 숙이고 온 밭이 그야말로 황금 물결을 이루는 가을 밭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농사하는 사람의 마음이 그것을 볼 때 얼마나 기쁜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낫을 대어 그것을 다 거두어서 단을 지어 묶어 가지고 들어오는 기쁨은 오직 농사를 해본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인 줄 압니다. 그러기에 눈물로 씨를 뿌리지만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나의 노력으로써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그 옥토 속에 복음의 말씀이 떨어져서 점점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을 볼 때에 오직 복음을 전파해 본 사람만이 그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줄 압니다. 어부도 또한 같은 줄 압니다. 낚시질하는 사람을 볼 것 같으면 강뚝 에 종일 나가서 혹은 배를 타고 종일 낚시 줄을 드리워 놓고는 앉아 있습니다. 자나가던 사람이 볼 때 얼마나 답답해 보이는지 모릅니다. 바다나 강물만 내려다보고 답답해서 어떻게 앉아 있을 수가 있는가 생각할 것입니다. 저도 사실 낚시질을 좀 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다가도 한 번 까딱 하고서 낚시 줄을 챌 때에 큰 고기가 하나 물려나오면 그 낚는 재미란 두 시간 세 시간 기다리던 것도 다 잊어버릴 정도입니다. 어떻게 기쁜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내가 너희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이 어부의 즐거움은 사람을 낚시질해 본 사람만이 깨달아 알 수 있는 줄 압니다. 성경을 보면 때때로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예수 님을 향하여『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실 때에 언제나 사랑스러웠고 언제나 기뻐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들을 두어본 사람만이 깨달을 줄 압니다. 가령 여기 어떤 부모가 있는데 그 아들이 잘 자라고 공부도 잘하고 품행도 단정하면 그저 사랑스럽고 마음이 늘 기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서 믿음의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가 얻은 다음에 그 아들이 점점 잘고 그 아들이 세례를 받아서 완전한 입교인이 되고 그 아들 그 아들이 집사가 되고 혹 장로가 되는 것을 볼 때 신앙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보다도 더 큰 기쁨은 없을 줄로 압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하고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도 종일 피곤한데 매까지 맞고도 감사하고 밤에 찬송하고 기도를 했다는 것을 읽을 때 얼른 생각하면 무슨 까닭인지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그것을 깨달아 알기가 과히 어렵지 아니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들이 타인의 영혼을 구원하다가, 사실 빌립보에서도 타인의 영혼을 구원한 까닭으로, 핍박을 받으면서 그런 어려운 자리에서도 그들의 마음은 기뻤습니다. 농부의 기쁨이요, 영적 어부의 기쁨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도 편지를 쓸 때에『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 하노니 기뻐하라. 너의 양선 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감사로써 하나님께 아뢰라』하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심지어 빌립보 2장 17절을 볼 것 같으면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만일 너희들이 너의 믿음을 제물로 삼아 드릴 것 같으면 내 피를 흘려서 그대 위에 부을지라도 기뻐하고 기뻐하리라.』사도 바울의 전도를 받아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너희들이 참으로 믿고 그 믿음을 받아서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제단 위에 놓고 제사를 드린다고 할 것이면 나는 내 가슴을 폐하고 뜨거운 피를 부을지라도, 나는 이 자리에 죽을지라도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여러분! 이것은 과장의 말이 아닙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그것과 꼭 같이 생각한 줄 압니다. 누구든지 이것을 해 본 사람은 그것이 사실인 줄 믿을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나 혼자 믿을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도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의 최고의 기쁨, 제일 높은 환희는 내가 복음을 전파하는 어부의 생활을 할 때에만 우리가 체험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부의 생활이 이렇게 재미있고 기쁘거든 하물며 하늘 나라에 가서야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더 기쁘겠습니까? 몇 십 년 전에 스코틀랜드 앤워드라는 도회에서 한 목사가 자기의 일기를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일기를 읽고 지금 은혜를 받은 사람이 많은데 그 일기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아! 앤워드에 있는 영혼들을 내가 하나님의 오른손 곁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하면 임마누엘의 땅에서 나의 하늘은 두 하늘이 될 것이다.』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전도하고 목회하고 기르던 앤워드의 정든 심령 하나 하나를 하나님의 오른손 곁에 가서 만날 수 있다고 하면 그는 너무 기뻐서 천당에 한 번 가지 않고 두 번 간 것 보다 더 기쁘겠다고 한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을 오늘 바꾸어서 말한다고 하면, 과연 오늘 성루에 있는 우리 영락교회에 출입하던 여러분의 영혼 하나 하나를 제가 이 다음 하나님의 오른손 옆에 가서 만날 수 있다면 임마누엘의 땅에서 제 하늘은 두 하늘이 되고도 남을 줄 압니다. 이에서 더 큰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3천 명에게 전도를 한 후에 하늘 나라에 가서 3천 명의 구원된 영혼을 만날 때에 베드로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한가지 더 기억하세요. 베드로처럼 三천 명은 구원하지 못했지만, 자기의 형 베드로를 예수 님께로 인도해 온 안드레가 하나님의 오른손 옆에 가서 자기 형 베드로를 만날 때 안드레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무디 같은 사람은 수십만 명의 영혼을 구원한 줄 압니다. 그이가 많은 영혼을 하나님 앞에 가서 만날 때 그의 마음의 기쁨은 말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본래 무디가 믿음이 없이 어떤 양화점에서 양화 직공으로 있을 때에 어떤 잘 믿는 무명 청년 하나가 아무래도 저 청년이 장래가 유망한데 내가 전도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그 양화점이 들어갔습니다.『여보시오, 양화만 만들 것이 아니라 예배당에 나와서 주의 일 좀 하고 잘 믿고 같이 구원의 길을 갑시다』고 잘 권면해서 그 사람을 구원한 킴볼! 이 사람이 하나님의 오른손 옆에 가서 자기의 인도로 구원을 받은 무디를 만날 때 이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천사 같이 말못하고 바울 같이 못하나 네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다고! 우리가 다 베드로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 무디는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안드레는 될 수 있고 킴볼은 될 수 있습니다.『네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내 친척 가운데서, 내 친구가운데서 한 사람 두 사람 구원할 수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고독이 이 세상에서도 좋지 않은 일일진대 특별히 하늘 나라에 가서 우리가 고독한 사람이 된다고 하면 얼마나 유감의 천국인지 알 수가 없겠습니다. 누구든지 믿는 사람들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줄 압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에 이런 말이 기록되었습니다.『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소개하는 자는 저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지식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해서 영혼을 구원하는 사람만이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했습니다.
온 세계는 여전히 흑암(黑暗)의 구름 속에 쌓여 있습니다. 온 세계의 모든 인류는 아직도 불안과 공포 속에 헤매고 있습니다. 언제 원자탄의 불 심판이 이 세상을 덮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온 세계 사람들은 평화를 동경합니다. 평화를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평화는 오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지혜는 다 사용해 보았지만 사람의 지혜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지혜는 다했습니다. 사람의 과학도 다했습니다. 사람의 도덕도 파산을 당했습니다. 교육도 결국은 세계 문제 해결을 하지 못하고 파탄이 되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멸망으로 들어가는 이 세계의 한 가지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권능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믿는 자에게 있습니다. 이 온 세계를 구원하라고 하는 이 귀한 말씀, 온 세계 유 일의 소망이 되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이 귀한 직분은 오늘날 우리 한국의 믿는 사람에게 맡겨졌습니다.
아! 아름답도다. 선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누가 이 길을 걷겠습니까?
(1954년 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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