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학단상

왜 삼위일체인가?

새벽지기1 2016. 10. 12. 15:55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신론인데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우선 이 용어가 성서에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간혹 근본주의적 성서관을 따르는 분들 중에는 창조 설화에 묘사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삼위일체의 근거라고 주장한다.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 1:26). 마태복음에도 이런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진술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 28:19,20). 창세기의 진술이나 마태복음의 진술은 아직 삼위일체론이 기독교 신학에서 충분하게 인식되기 이전의 것들이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집적 가리키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신구약성서에 삼위일체론을 암시하는 진술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삼위일체’라는 용어나 그 개념을 직접 거론하는 텍스트는 한 군데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삼위일체론은 어떤 구체적인 신앙생활의 실천이나 성서 텍스트보다는 순전히 신학적 사유에 근거한 개념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삼위일체 교리만 유독 신학적 개념과 연관된다고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다른 도그마에 비해서 그런 성격이 도드라진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기독교 신앙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사도신경도 창조자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을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단지 각각의 역할을 설명하는 것뿐이지 삼위일체 개념에서 중요한 세 위격의 관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이처럼 사도신경마저 삼위일체론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거나 해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결국 삼위일체론이 사변적 신학의 요청으로 인한 결과였다는 의미이다.


결국 교회 현장에서 소홀하게 다루어지는 삼위일체 개념은 충분한 신학적 훈련이 없으면 따라잡기 힘들다는 말이 된다.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사물을 경험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해한다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르겠다. 간혹 한 인격체가 가정에서 남편의 역할을, 회사에서 직원의 역할을, 교회에서 집사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일종의 역할론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하지만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이런 유비의 방식으로는 충분하게 해명될 수 없다. 조금 신학적인 방식으로 이 용어를 서술한다면 삼위일체 개념은 하나님이 위격으로는 셋으로 구분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로 통일된다는 의미이다.


아버지의 인격과 아들의 인격과 영의 인격이 각각 다르다는 말은 일단 크게 어려운 것 같지는 않다.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전능한 인격이며, 예수는 역사 안에 철저하게 의존해 있던 우리와 똑같은 인격이며, 영은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관여하는 힘으로서의 인격이다. 그러나 이런 세 인격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여기서 인격과 본질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예수는 무슨 이유로 공생애 중에 이런 삼위일체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셨을까?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기독교의 신론은 유일신론이 아니라 삼신론에 가깝다는 말일까? 야훼 하나님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인데, 아들과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서로 모순 되는 주장이 아닐까?


삼위일체론에 관한 질문은 거의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포괄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두 가지 문제로 집중해보자. 첫째, 삼위일체론은 일자무식의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할 기독교의 복음으로서는 무의미한 것은 아닐까? 사실 삼위일체만 이해하기 힘든 게 아니라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단순성과 복잡성이라는 양면성이 있다. 예컨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아주 간단한 교리이지만 과연 믿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기 시작하면 매우 복잡해진다. 구원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없겠지만 그 구원의 심층적 의미에서 전개되는 사안들을 알아들을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예수의 설교는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달리 모든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 어려워서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불평이 나올 정도였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복음이 지나치게 현학적이어서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거나 혹은 단지 지성적으로 접근하게 만드는 것도 문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나치게 단순한 형식논리에 빠져서 신자들의 신앙을 주술화하거나 편이주의에 치우치게 하는 것도 문제이다. 단순성과 복잡성이 적절한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만 기독교 교리가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삼위일체는 복음을 훼손하거나 복음의 근본과 무관한 게 아니라 복음의 의미를 심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신학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이런 불가해한 교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우리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가 처음부터, 혹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게 아니라 주변 세계와의 대화 가운데서 ‘변증적’ 필요에 따라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에 관한 정체성을 해명하기 위해서 ‘참된 신이며, 참된 인간’이라는 기독론이 발생했듯이 삼위일체도 역시 유대교와 동일한 야훼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들이 부정한 역사적 인물인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믿는 자신들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해명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말이다. 특히 교부들이 신플라토니즘과의 만남에서 이런 삼위일체에 관한 신학적 착상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학의 고유한 활동이 무엇인가를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신학은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을 변증하기 위해 보편적 학문과의 대화를 진지하고 신중하게 이끌어야 한다. 이런 작업에 투철했던 교부들 덕분에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인식론적 틀에서 훨씬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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