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단상

인간은 변화할 수 있는가?

새벽지기1 2016. 7. 18. 14:33


사람은 누구나 허물이 있다. 깊이 파인 상처와 슬픔, 심하게 이지러지고 뒤틀린 존재의 짐을 끌어안고 휘청거리며 살아가고 있다. 물론 현재의 자기에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대로 살다 죽을 거라며 변화를 포기한 사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현재의 자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뭔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를 소원하고, 오늘보다는 더 멋진 내일의 나를 꿈꾸며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어쩌면 인격과 삶의 변화를 모색하고 꿈꾸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정직한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사실 인간의 변화는 하나님도 원하시는 바다. 만물을 새롭게 하는 것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가장 위대한 역사이며 온 세상이 기대하는 종말론적 소망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로 물든 인간을 새로운 피조물로 회복시키셨다(고후5:17). 바울이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됨을 경험한 것,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고(고후4:16), 사도 요한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위대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계21:5).

 

그렇다. 사람은 진정 변화가 요구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변화를 추구하는 존재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포함해 만물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을 행하고 계신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실체적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과연 변화할 수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변화라고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당위이고 현실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자. 당신은 살아오면서 얼마나 변화했다고 생각하는가? 자연적인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신체적인 변화나 기질적인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인격과 삶의 변화, 죄성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은 변화했다고 말하기도 애매할 것이고, 변화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할 것이다. 나는 이 애매함이야말로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바라보는 가장 정직한 현실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변화를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극단이라고 생각한다.

 

극단의 양상을 보자. 인간의 도덕적인 무력함에 절망하거나 분노하는 자들은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아예 거부한다. 이들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변화의 일을 하고 계신다는 희망찬 소식도 거부한 채 변화되지 않는 인간의 잔악한 역사적 실상을 들이대며 사람은 절대 변화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기 또한 죽을 때까지 이 모습으로 밖에 살 수 없다고 말하고, 나의 변화를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말라고 선을 그으며 구멍 난 자신을 고집한다.

반대로 인간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고 주창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매우 낙관하면서, 변화의 방법을 알고 노력만 한다면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자기 개발 프로그램을 만들어 판매하는 자들도 많고, 자기 주도적인 변화 프로그램에 희망을 거는 자들도 많다.

 

극단은 언제나 진리에서 멀다. ‘인간은 변화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인간을 단순한 자연 - 즉 결정체로 본다는 문제가 있고, ‘인간은 변화할 수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변화하기 어려운 인간의 한계를 간과한 채 낙관적인 환상에 사로잡히거나 몇 가지 현상적인 변화에 열광할 수 있는 문제가 있다. 양 극단 모두 인간을 바라보는 눈이 지나치게 가볍고 피상적이라는 문제가 있다.

 

사실 인간은 자연이면서 동시에 자연을 넘어서는 존재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변화의 한계와 가능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변화할 수 있지만, 인간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피상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할 뿐 아니라 지극히 미미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한계를 안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 인간은 변화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상당히 근본적인 변화 가능성조차도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거의 변화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을 만큼 변화가 어렵고 미미하고 더딘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불편한 진실이다. 애매모호함을 극복하기 어려운 어정쩡한 태도이다. 하지만 인간의 변화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애매모호함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현실 인식이요 지혜라고 생각한다. 허물을 가진 인간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혜로 깨어있어야 변화를 위해 중단 없는 노력을 하면서도 변화의 한계와 어려움 앞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또 도무지 변화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 고집스런 이웃을 포용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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