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권인목사

쇼생크(시삭) 구원 이야기

새벽지기1 2016. 7. 13. 08:40


샬롬! 찬미예수

 

너무 유명한 영화여서 많은 사람들이 이미 보았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꼭 추천하고 싶은 영화 '쇼생크 탈출'  

쇼생크 탈출의 영화는 우리의 삶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감옥에 비유하고 그런 현실을 벗어나려하면 다시 잡아두어

힘으로 작용하는 모든 권력과 권세들로 인하여 길들여지는 보편적인 인간 삶의 구조를 고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교화를 위한 목적이 아닌 감옥은 죄수들을 단지 사회에서 격리시켜 무기력한 존재로 만드는 '길들이기'를 시도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그들 개개인은 감옥에서는 나름의 사회를 형성하고 '의미'를 가진 '존재감'을 갖고 있지만, 막상 사회에 나가서는 별다른 재주 없는

범죄자 출신의 사회 암적인 존재로 인식되는 현실 말이다.

Red의 거듭되는 출소 부적격 판정에서 권력자들의 행태들, 한 인간의 최소한의 희망과 의지마저도 철저히 차단시키려드는 그곳.    

'희망'에 대해 Andy와 다른 생각을 읊조리는 부분은 레드 역시 또 다른 'Brooks'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바쁘게 살든지, 바쁘게 죽는 일 밖엔 아무런 소망도 없는 회색 빛이 감도는 칙칙한 감옥 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의 구도 속에서 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Andy는 그 누구도 함부로 길들일 수 없는 사람으로 부각된다.

영화 포스터에서 자유를 찾은 환희로움 위엔 명언이 새겨져 있다.

'Fear can hold you prisoner. 두려움은 너를 죄수로 붙잡아 둘 수 있지만,

Hope can set you free. 희망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표제가 이 영화의 주제를 말해주고 있다.

그의 모습은 결국 그가 종국적으로 하는 행동들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개연성을 지속적으로 부여한다.

쇼생크 탈출은 교도소의 억압과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서 주인공 Andy 듀플레인의 삶과 운명,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의 이야기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의 삶에서 희망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희망을 버리지 않을 때, 거기 진정한 구원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의 영화이다.  

 

노튼 소장의 비밀 금고를 가리는 십자수의 글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시75:2)은

모든 일이 밝혀지고 경찰들과 기자들이 몰아닥쳤을 때 노튼 소장이 그 구절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모습에서

'심판의 때가 다가온다.'라는 좀 더 직접적인 번역이 가능한 구절로 스스로에게 닥친 심판임을 직감한다.  

앤디가 망치를 감추기 위해 사용한 성경에서 구멍이 파였던 첫 장이 Exodus(출애굽기, 탈출기)인 것도 묘한 대비가 된다.

 

쇼생크 탈출은 쇼생크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오히려 쇼생크가 구원을 받는 얘기다.

우리말로 번역된 제목보다 영어 원제는 The shawshank redemption이다.

쇼생크는 가상의 주립 교도소로서 설정되었지만 쇼생크에서 누구를 구원한 이야기가 아니라 쇼생크 당사자가 구원을 받는 이야기다.

앤디 듀프레인 이야기도 아니고, 레디의 이야기도 아니고, 쇼생크 노튼이라는 소장이 그 정점에 서있는 폐쇄된 심판의 장소,

벌을 받고 있는 장소인 교도소가 구원을 받는 이야기다.

그 속에 묻혀있는 재미들로 이 중요한 부분을 놓치면 안 된다.

 

쇼생크는 Red가 네레이터로서 전혀 반대 세계를 대표하는 두 사람, 억울하게 잡혀온 은행원 Andy와

교도소 소장인 노튼, 이 둘 사이에 Red는 제 3의 인물로서, 모든 일반적인 사람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이 어디에 기우냐가 이 영화의 핵심이다.

노튼이 되거나 Andy가 되는 얘기가 아니라, 이 레드가 누구 편을 드느냐 인데 어떻게, 왜 들게 되느냐를 보는 게 이 영화를 제대로 보는 것이다.

Red는 해설자가 아니라 레드는 우리 인류라는 모든 존재, 역사 내내 모든 인류, 하나님이 만인을 구원하러 오셨다하는

만인에 해당하는 모든 보편적인 인류를 대신하고 있다.

그가 똑똑하거나 그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필요를 모르고 죄 아래 태어난 사람들을 어떻게,

누가 그들을 납득시키고 데리고 가느냐의 싸움이다.

만만치 않은 주제를 가지고 있는 영화다.

 

쇼생크는 열왕기상 11:28-40절에서 여로보암이 솔로몬 왕의 핍박을 피해서, 반역자가 되어서 아히야의 기름 부음을 받아

북 왕국의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게 되는 얘기가 나온다.

솔로몬의 시대 때, 솔로몬의 통치가 너무 궁전도 짓고, 성전도 짓고 하면서 백성들의 허리가 휘었다.

그에 대항한 여로보암을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해서 죽이려고 할 때, 그는 애굽으로 도망을 갔다.

애굽에 도망갔을 때, 그 애굽의 왕 이름 시삭(Shishak King)으로 번역된 것이 영어로 쇼생크이다(왕상11:40).

 

우리가 사는 세상이 교도소 같이 하나님 없는 권력, 사망이라는 권력과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다.

시삭의 구원, 바로의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쇼생크에서 탈옥을 하는 것이 구원이 아닌, 쇼생크가 구원을 만드는 것이다.

바로의 구원이라는 건 뭐냐 하면, 출애굽 사건의 중요성을 다시 우리에게 떠올리게 하는데,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는 정도가 아니다.

애굽이 이스라엘을 붙들고 영원무궁토록 권력을 누리면, 인류는 말하자면 노예로 끝나는 것이다.

인류와 역사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벗어나야 되는 것은 애굽이라는 권력이 깨져야 되는 것이다.

세상, 죽음이라는 권력을 가진 애굽(세상)이 깨지는 것이 출애굽이다.

그리하여 애굽은 구원을 얻는 것이다.

애굽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인류가 구원을 얻는 것이다.

 

쇼생크 탈출(쇼생크의 구원)

쇼생크는 열왕기상 11:28-40절에서 여로보암이 솔로몬 왕의 핍박을 피해서, 반역자가 되어서 아히야의 기름 부음을 받아 북 왕국의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게 되는 얘기가 나온다. 솔로몬의 시대 때, 솔로몬의 통치가 너무 궁전도 짓고, 성전도 짓고 하면서 백성들의 허리가 휘었다. 그에 대항한 여로보암을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해서 죽이려고 할 때, 그는 애굽으로 도망을 갔다. 애굽에 도망갔을 때, 애굽의 왕 이름 시삭(Shishak King)으로 번역된 것이 영어로 쇼생크이다(왕상11:40). 그는 그 후 르호보암 왕 때에 그가 예루살렘을 침입하여 성전과 왕궁에 있는 보물을 빼앗아 갔다(왕상14:25).

시삭의 구원 그러면 출애굽에서는 그게 뭐가 되냐 하면 바로의 구원이 된다. 바로라는 것은 애굽 왕의 공식 명칭, 칭호가 된다. 왕조가 한 왕조만 계속 된 것이 아니니까 그때 왕 이름은 바로, 솔로몬 때는 그게 시삭이다. 시삭의 구원은 애굽의 구원인데, 애굽의 구원은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으로 나온다. 출애굽이 왜 애굽의 구원이냐 하면 애굽이라는 노예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는 히브리인들이 그것을 깨고 나옴으로서 히브리인들이 애굽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인류를 죽음이라는 곳에 붙잡고 다른 데로 도망갈 수 없게 했던 체제가 깨지는 것으로서 애굽 자신이 교도소와 교도소 소장, 또는 경비대장 밖에 할 수 없는 자들이 자기네가 궁극적 권력과 체제가 깨짐으로서 본인들도 구원을 받는 것이 출애굽이다. 애굽이 세상에 유일한 권력과 운명이 아니게 만드시는 사건이 출애굽이다. 애굽은 나쁜 놈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편애하는 선민이라서가 아닌, 그런 대조가 인종적 민족적 대조가 아니라 이 세상이 만든 사망과 절망의 체계를 하나님이 들어와 깼다. Andy가 탈옥함으로서 그 감옥은 더 이상 마지막 운명일 수만은 없게 된 것, 그게 shawshank redemption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교도소 같다. 하나님 없는 권력, 사망이라는 권력과 폭력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권력에 속해 있지 않다.

시삭의 구원, 바로의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쇼생크에서 탈옥을 하는 것이 구원이 아닌 쇼생크가 구원을 만드는 것이다. 심오한 질문이다. 바로의 구원이라는 건 뭐냐 하면, 출애굽 사건의 중요성을 다시 우리에게 떠올리게 하는데,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는 정도가 아니다. 애굽이 이스라엘을 붙들고 영원무궁토록 권력을 누리면, 인류는 말하자면 노예로 끝나는 것이다. 인류와 역사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벗어나야 되는 것은 애굽이라는 권력이 깨져야 되는 것이다. 세상, 죽음이라는 권력을 가진 세상이 깨지는 것이 출애굽이다. 그리하여 애굽은 구원을 얻는 것이다. 애굽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인류가 구원을 얻는 것이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는데 그 과정이 전부 다 반전에 의한 것이다. 순리대로라면 갈 수 없는 자리를 가는 것이다. 요셉은 일단 애굽 사람이 아니라 히브리사람이다. 형들이 죽이려고 하는 동생이고, 봐줘서 팔아먹은 동생이다. 노예로 팔려서 억울한 옥살이를 해서 출애굽 해야 된다. 그러나 그 일이 순조로운 길을 걸어도 갈 수 없는 자리를, 가장 반대의 경우로 그 자리를 간다. 그를 쳐 넣은 건 시위대장인데, 그리하여 요셉이 총리가 되고, 애굽과 자신의 온 가족과 이스라엘을 도왔다. 그 반전을 잘 보라. 형들이 동생을 팔아먹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다. 이러한 역설을 알아듣는가? 그게 출애굽이다.

출애굽은 굉장한 역설이다! 요셉은 감옥에서 정신이 나간다. 그 발이 차꼬를 차고 그 몸이 쇠사슬에 묶였으니(히브리 원어로는 그 쇠사슬이 그 혼을 뚫었으니), 우리말로 혼비백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씀이 그를 단련한다. 여호와의 뜻이 응할 때까지 그는 묶여있어야 된다. 그러면서 뒤에 일어난 일들이 그가 만든 일도 아닌데, 아니라는 게 너무나 충분히 확보될 때까지 그는 묶여있어야 된다. 우리는 이제껏 요셉의 비전을 이야기하며 그가 꿈을 꿈 꿨다고? 잘도 붙여댔다. 과연 그런가? 자기도 개꿈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비전을 가졌다고? 그 따위 소리 하지 마시라! 철이 없어서 형들 앞에 그 꿈 얘기해서 구박받았다는 사실이다. 무슨 비전을 그렇게 가졌겠는가? 역전과 반전의 이야기들인 것이다.

쇼생크 탈출은 그렇게 담담히 만들어낸 영화인 것이다. 내가 사는 삶에 어디나 구원이 들어올 수 있다. 그 영화에서 맥주 먹는 장면을 보라! 그게 왜 중요하냐하면, 감옥이라는 데는 공포와 절망 밖에 없는 곳이다. 거기에 어떤 사치스런 여유를 부리거나 웃음을 끌어들이고 해프닝을 곳이 아니다. 주인공이! 우리는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위대한 역할을 하라 그러면 간단치 않다. 우린 '레드'인 것이다. 옆에 있는 사람, 그걸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웃을 수 있게 되는 사람이다. 우린 너무 들떠 있다. 그 너무 책임감에 묶여있다. 자책이 심하고 우리의 한계에서 절망한다. 그러지 말라. 하나님이 어떻게 일 하시는가 호기심을 가지고 희망을 버리지 말고 살아내고 살아가는 것 자체도 참 중요하고 소중하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스스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 안에 잔뜩 희망을 넣어 놨고, 약속을 넣어 놨고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어떠한 형편과 상황에서도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고 신뢰하는 일이 건강한 믿음이다.

마지막 무렵에 탈옥하는 장면을 보라. 밤 새 잠을 못자고 아침에 점호하러 나왔는데, Andy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그 일상과 같았던 하루 속에 Andy는 없었다. 우리 인생이 그렇다. 영화가 아무리 극화해도 하나님이 일하신 것을 극화할 수가 없다. 영화에서 만드는 어떤 반전보다도 하나님의 일하심은 훨씬 크다. 사람이 자기 운명을 다 책임져서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는 걸 드디어 알게 될 때 우리가 훌륭해지는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방기하거나 불성실해도 좋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 세상의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 악의 원리들을 읽어내고 절망할 수 있을 때 구원의 빛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다 훌륭해지려고 해서 그렇게 표정이 나쁜 것이다. 거예요. 거기에 너무 묶이지 말아야 한다. 훌륭해져야 되는 일만이 유일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레드같이… 레드가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영화의 큰 특징이다. 주인공이 위대하게 드러나지 않고, 레드가 얘기하는 거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옆에서 일어난 일을 증언한다. Red가 맡은 역이다. 아무래도 좋다. 꼭 언제나 주인공이 되어야만 하고 훌륭한 역할만 맡을 수는 없다. 어떠한 형편 어떠한 처지에서도 그렇게 살아내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그 풍성함이 어디에든 담길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있는 곳에는 정말 희망이 있고, 구원이 있고, 웃음이 있어야 된다. 주인공이 탈옥한 다음에 그 감옥에 웃음이 들어왔다는 것을 대조시킨다.

감옥에서 동료들이 식사하면서 하는 대화들을 기억하는가? "엔디가 그랬지. '부인을 믿으십니까?' '이 새끼 죽여 버리겠어!' 그리고 우리 맥주 얻어먹었잖아!" 우리를 동료라고 했어 라며 막 웃는 장면! 자기네들은 아직 잡혀있지만, 웃음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이 부분에서 아주 큰 부분이다. 알아듣는가? 우리가 있음으로 주위가 따뜻해지고 웃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큰소리 치고 바른말 해서 탈옥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부룩스(Brook)는 죽는다. 여기를 나가면 뭐하는가? 본인에게 자유가 실제적인 힘이고, 내용이 되어야지! 여기를 나가면 돌아올 생각만 하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살아내야 할 내용과 동기가 없다면 부룩스처럼 죽거나 레드 역시 나가자, 돌아올 생각만 하듯이 주긍믜 세력권에서 한 치도 생명의 발상을 하지 못한다. 왜? 실력 없는 자에게는 자유를 주면 그 자유가 진리가 되지 못하고 방종이 될 뿐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병! 구원은 얻었는데 실력이 없으니까, 세상사람 같게도 못살고, 예수 믿는 것 같게도 못살고 빨리 죽여 달라는 기도밖에 할 게 없다. 더 살아봤자 자책할 것만 남으니까, 매일 만나면 죽겠다는 얘기하고, 진심은 있는데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는다는 푸념만 늘어간다. 그 딴 소리하지 말라. 그냥 살아가라. 느릿느릿 살아가라. 아무것으로 아닌 것으로 살아가라. 거기에 하나님이 담으실 것이다. 그런 영화가 바로 이 쇼생크 탈출에 담겨 있고 녹아있는 영화다.

휘가로의 결혼, 여성 이중창 나오는 것 들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음악을 듣는다는 것 자체는 천국이다. 그대로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한 모습들이다. 우리가 지나가면 음악이 되고, 산들바람이 되고, 반가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서 하시는 일이다. 표정부터 고치야 된다. 표정을! 흘러 넘칠 게 있어야 될 게 아닌가? 밤낮 쥐어짜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누가 반갑겠는가? 힘 드는데 어떻게 하냐고 자신 자신의 중심성에만 묶여 있고 늘 심각한 사람은 너무 이기적인 사람이다. 모두가 힘들다. 그러니까 주인공같이 약간만 인상을 쓰고 그 대신 목소리는 낮추고 살라.

이 영화는 죄수들이 주인공이다. 저들의 구원이야기다. 저들이 기껏 어떻게 하고 사는가? 새로 들어오는 신참 죄수들 중에 누가 먼저 울 것이냐에 까치 담배를 거는 정도가 유일한 즐길 거리가 되는 장소에서 나중에 앤디가 탈옥 한 다음에 계속 떠올리는 장면이 무엇인가? 그들의 대화 속에는 정당한 복수를 한 사람들 같이 파안대소를 하면서 그래 "그때 Andy가 그랬지, 우리 동료들에게 맥주 한 병씩 주시면 됩니다. 우리보고 동료라고 그랬어!" 웃음과 긍정적인 교제가 없는, 오직 공포와 거기 앤디가 한 말대로라면 바쁘게 살든가, 그 말은 생각 없이 살든가, 바쁘게 죽든가 라고 번역된 빨리 죽든가 그것 밖에 없는 세상에서, Andy가 저들에게 웃을 수 있는, 쇼생크가 공포와 정죄 밖에 없었던 곳에 웃음을 만들고 같이 웃을 동료를 만들어냈다. 이게 쇼생크의 구원이다. 공포와 심판과 절망과 죽음 밖에 없는 곳에 희망을 만들어냈다. 웃을 수 있는 희망, 그리고 Andy가 쇼생크를 벗어남으로서 쇼생크가 궁극적인 폐쇄 공간으로 남을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이 쇼생크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