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프란시스 쉐퍼

지금은 세상을 위해 울어야 할 때 / 프란시스 쉐퍼

새벽지기1 2016. 6. 28. 22:03

 

프란시스 쉐퍼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 눈물을 기억하자
존 피셔 John Fischer 2011.10.27 홍종락 옮김
    
작은 사람이었다. 니커보커스 바지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양말, 부풀어 오른 하얀 셔츠 차림, 키는 150센티미터를 조금 넘었다. 나는 휘튼대학의 채플 지정석에 앉아 2주 동안 그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한 번은 1학년 때였고, 또 한 번은 4학년 때였다. 그는 20세기 말, 세상을 위해 우는 복음주의권의 양심이었다. 그의 동료들 대다수는 세상은 구원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고, 지구는 쇠퇴기에 접어들어 어차피 멸망할 운명이니 그중에서 소수의 영혼이나 구해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핼 린지가 「대행성 지구의 마지막 때」(The Late Great Planet Earth)를 펴내 출구전략을 퍼뜨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프란시스 쉐퍼는 「거기 계시는 하나님」(생명의말씀사 역간)을 써서 그 행성에 아직 갇혀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보살피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프란시스 쉐퍼의 말을 듣는 일은 고역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귀에 무척 거슬렸다. 그가 펜실베이니아주 동부 억양으로 질러대는 고음은 [벅스 버니를 잡으러 다니는 사냥꾼] 엘머 퍼드의 말을 빠르게 재생해놓은 것 같았다. 신입생 시절, 근대인의 사상과 저작을 잘 몰랐던 우리는 그 목소리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4학년이 되어 듣는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웃기지 않았다. 칸트, 헤겔, 사르트르, 카뮈를 공부한 우리에게 그 소리는 오히려 실존주의적 비명으로 들렸다.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절규>에서 소리가 난다면 아마 쉐퍼의 목소리와 비슷할 것이다. 1984년에 세상을 떠난 쉐퍼는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에 갇혀 내지르는 실존주의적 부르짖음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슬픔의 사람”에 가까웠다.

내가 어려서부터 배운 기독교는 슬픔을 적대시하는 종교였다. 슬퍼한다는 건 신앙이 없거나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신 분이고 우리는 언제나 행복한 모습을 보여줄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프란시스 쉐퍼가 나타났다. 그는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절망적으로 빛을 잃은 상황에서 그 이유를 아는 자로서 편안하게 행복을 누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서 기독교 신앙도 붙들고, 빛을 잃어버린 인류의 절망도 놓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는 잃었던 생명을 찾았으나 광명을 잃어버린 삶이 어떤 것인지 잊지 않았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가! 오늘날 세상에서는 종교적 우파를 신정정치를 추구하고 가난한 자들과 짓밟힌 자들에게 무관심한 무리로 희화화한다. 물론 「미국의 신정정치」(American Theocracy)부터 「나라가 임하옵시며」(Thy Kingdom Come)에 이르기까지 선거를 앞두고 쏟아져 나오는 책들에서 기독교 우파의 실상인 양 그려지는 이 흉하고 상투적인 이미지는 그 구성원들이 위기임신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인도주의 사업을 펼치며, 신앙적이건 아니건 좋은 취지의 일들에 관대하게 기부한다는 사실을 빠뜨리고 있다.

쉐퍼의 방식

하지만 상투적 이미지가 대개 그렇듯,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미지 역시 괴롭지만 옳은 부분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하나님의 계획과 혼동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어떻게든 정치적인 우세를 점하려다 보니 적들을 사악한 존재로 매도하는 경우도 매우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문화전쟁에 참가하는 전사들 중 상당수는 문화전쟁의 첫 방아쇠를 당긴 장본인이 바로 쉐퍼라 여기고 있다.

물론 쉐퍼는 말년에 쓴 두 권의 저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기독교 선언」(이상 생명의말씀사 역간)에서 낙태와 안락사를 단호하게 반대했고, 미국문화의 자살이라 할 만한 상황이 임박했으니 정치적 개입을 포함한 심각한 조치를 실행해서라도 그것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문화전쟁 참전 촉구를 쉐퍼의 최고 업적으로 생각한다면 그의 사람됨과 활동을 상당 부분 놓치게 된다.

쉐퍼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들은 문화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 차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싸움을 독려하는 구호로 울려퍼졌을지 몰라도, 그 이전까지 펴낸 그의 모든 저작의 논지는 그와 달랐다. 쉐퍼 사역의 본질은 세상과 싸우라는 외침이 아니라 세상을 보살피라는 외침이다. 싸움에 뛰어들어 쉐퍼를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내세우는 사람들은 그가 전한 메시지의 일부만 받아들인 것이다.

쉐퍼는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서 전투적 태세를 취하기에 앞서 사회를 이 지경으로 이끈 인간의 곤경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기독교 선언」과 그 이후의 책만 알고, 「이성에서의 도피」, 「거기 계시는 하나님」, 「도시 속의 죽음」(이상 생명의말씀사 역간)을 모르는 사람은 쉐퍼의 생애와 활동을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전기와 후기의 쉐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위해 울라

쉐퍼는 내게 세상의 심판자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처음 가르쳐준 기독교 지도자였다. 그는 철학의 역사와 그것이 영화, 소설, 연극, 음악, 미술을 통해 끼치는 영향력에 깊은 관심을 갖고 사려 깊게 연구하는 본을 보여주었다. 쉐퍼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1966년 영화<욕망>에 표현된 실존주의적 딜레마를 휘튼대학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당시만 해도 휘튼대학은 학생들의 영화 관람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교계의 율법주의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방식을 고집했다. 문화적 진술에 담긴 절박함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 속의 죽음」은 구약성경의 예레미야애가를 미국에 적용한 책이다. 한 사회의 문화적 죽음을 놓고 슬피 우는 내용이다. 쉐퍼는 당대의 가장 탁월한 사상가들과 예술가들이 소위 ‘절망의 선’ 아래 갇혀 있다고 보았다. 하층부의 절망에 갇혀 상층부의 계시에 이를 도리가 없다고 본 것이다. 쉐퍼는 추종자들에게 현대예술에 나타나는 부조화를 비웃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 예술가들은 하나님을 제거하고 인간적, 이성적 수준에서만 모든 근거를 찾았던 근대라는 시대정신의 논리적 결론을 표현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울하고 어둡고 추상적인 예술작품을 대하고 나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올바른 반응은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창조한 사람이 처한 빛을 잃은 그 상태를 슬퍼해야 한다. 쉐퍼는 불신자와 싸울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보기 드문 기독교 지도자였다.

프란시스 쉐퍼는 ‘왜?’라고 묻기를 겁내지 않았고 해답을 찾을 때까지 쉬지 않았다. ‘우리의 가장 뛰어난 사상가들이 왜 절망에 빠져 있을까?’ ‘우리 시대의 예술은 왜 이렇게 어두울까?’ ‘어쩌다 낙태와 안락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세대가 나오게 되었을까?’ ‘어떤 사고 과정이 인간 생명의 가치를 이렇게 철저히 경시하도록 만들었을까?’ 이 질문들에 대한 그의 답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해답을 추구하며 보여준 열정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대개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을 미워한다. 미지의 대상에 대한 혐오 때문에 선입견이 생겨나고 증오범죄가 발생하며 사회적 악도 늘어난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들이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알아보는 것이 훨씬 더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다. 비록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우리의 원수지만,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에는 원수들이 혐오스럽게 행동하는 이유를 이해하려 애쓰는 그리스도인이 너무나 적다.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페미니스트, 세속 인본주의자, 동성애 활동가,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느라 바쁜 나머지 그들이 왜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지 헤아려볼 여유가 없다. 우리의 자녀들과 이웃에 위협적인 존재라고 단정해버린 사람들에게 공감하기란 어렵다. 원수로 선언해버린 사람들을 위해 울기란 어렵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우리 영혼이 얼마나 부패했으며 그런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아래까지 내려와야 했는지를 더욱 온전히 파악하는 것이리라. 자신의 모습 때문에 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위해서도 울 수 없을 것이므로.

근년에 프란시스 쉐퍼의 영향력이 쇠퇴한 것은 사실이다. 그가 아주 오랫동안 분석 대상으로 삼았던 근대성이 탈근대주의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쉐퍼에게도 비판자들이 있고, 그중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그러나 그가 교회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그가 남긴 말이 아니라 눈물일지도 모른다. 그가 당대에 안타까워 울었던 문제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니, 우리도 그로 인해 울어야 하지 않겠는가.

(존 피셔(John Fischer)는 12장의 앨범을 발표한 싱어송라이터이며 15권의 책을 쓴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