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여름밤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도록 기회를 주셨다. 그 어느 날 설교단에 오르는 순간 나의 마음과 전신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으며, 하나님은 일찌기 내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일을 이 한 편의 설교를 통하여 하실 것이라는 신적인 확신이 나를 사로 잡았다.
그리고 나는 설교가 행해지는 예배 장소 바깥에서 배회하는 모든 사람들을 모두 들어오도록 강권하였다. 그리고 예배 순서를 따라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설교할 본문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며 우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기록된 누가복음19장41절부터 44절까지의 본문이었다.
설교는 한 시간 남짓 계속되었고 설교가 계속되는 동안 무엇인가 만지면 곧 터질 것 같은 경건한 슬픔이 교회당을 크게 엄습하였다. 설교가 계속되는 동안에 여기저기서 억제된 흐느낌이, 약간 어두운 교회당을 가득 메웠다. 그들은 마치 한 말씀이라도 더 듣기 위하여 복받치는 설움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장소는 깊은 산중이었고 때는 어두운 밤이었다. 밖에는 폭우와 번개를 동반한 세찬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우리의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하여 설교할 때 순간 순간 하늘이 찢어지는 것 같은 광음이 들렸고 먼 산 기슭에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이한 빛이 교회당에 안에 번뜩이면서 설교는 절정을 향하여 치달았다. 나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성령께서 그같은 자연 환경을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사용하셨다고 생각한다.
설교가 끝나마자 마치 총에 맞은 짐승들의 울부짖음 같은 비통한 부르짖음이 온 교회당 안에 가득하였고, 그 부르짖음이 어찌나 극도에 달했는지 집회하는 예배당의 천정이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울부짖음은 고요한 밤하늘에 이따금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를 타고 골골이 휘돌아 나갔다. 사람들은 설교 중에 극심한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하였다. 영적으로 눌린 자들을 드러내시고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밑도 끝도 없는 깊은 죄의식에 사로 잡혀서, 자신을 가리켜 "죄악 덩어리"라고 고백하였다.
자신에 대한 이러한 패배감은 아기 예수에 대한 시므온의 예언을 생각나게 하였다. 이 복된 패배감은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다. 저녁 일곱시 삼십분 경에 시작된 예배는 이튿날 새벽 한 시 반이 되었는데도 끝나지 아니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일어선 채 벽을 붙들고 서서 앉는 것도 잊어버린 채 두시간이 넘도록 폭포수 같은 눈물로 회개하였다.
성령은 집회의 인도자를 밀치시고 스스로 예배를 주관하셨다. 성령은 임하셨고 죄인들의 마음을 녹이셨으며 회개가 끝나자 성령의 각양 은사들은 회중을 뒤덮었다. 그것은 분명히 은혜 체험 이상의 사건이었다. 회중 가운데 괄목할 만한 변화는 그 이후에 일어났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설교자로서 그들 앞에서 느끼는 나의 느낌은 목석 앞에서 설교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단지 귀를 기울일 뿐 아무런 느낌도 설교를 통하여 기대하지 아니하였다. 후일 그들은 나의 말씀 증거를 설교가 아니라 단지 소리로 느꼈다고 술회하며 말씀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를 후회하였다. 그런 놀라운 일이 있고 난 후에 제일 먼저 달라진 것은 예배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 외에 주일을 통하여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짧으면 한 시간 반, 혹은 길면 약 세 시간 가까이 계속되는 나의 설교를 마음을 다하여 경청하였다.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모습은 마치 석고상을 깎아 놓은 것 같았다.
회중석에서는, 설교가 시작되어서 끝날 때까지 추호의 미동(微動)도 없었다. 나는 그 이후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 아이와 같이 그토록 사모하며, 말씀을 듣기 위하여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회중들 앞에 설교해 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은 한 번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잊어버리지 아니하였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몇 주, 혹은 몇 년씩이나, 아니 지금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도 그 설교를 기억하고 그 말씀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뛰어난 영적인 축복을 누렸던 탁월한 시기는 비록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그 동안은 마치 하늘 나라가 지상에 내려와 있는 것 같았다.
그후 헤아릴 수 없는 날 동안 설교했지만, 같은 일의 일어남을 보지 못하였다. 후일에야 그것이 참된 영적 부흥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끝 없는 고통과 대적이 둘러 싸고 있었으나 내 인생 어느 때에도 그렇게 행복한 때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잠자는 교회들에 진리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거룩의 회복을 주시도록 설교하고 글을 쓰며 살아간다. 깨달은 교훈을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다.
신학공부를 하기 이전에 평신도로서 주일학교 학생들을 섬길 때부터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는 양떼들의 뚜렷한 회심 같은 것을 풍성하게 경험하게 하셨다. 그랬기 때문에 성령의 풍성한 역사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성령의 역사를 경험해 오면서 자신을 향하여 정리되는 생각이 몇가지 있다.
첫째로 그것은 우선 성령의 체험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과 기쁨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성령을 체험하고 나면 순결해 지고 싶고 거룩하신 주님의 성품을 본 받고 싶어지고 더욱 친밀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따라서 매우 친밀하고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아니면 영혼이 만족을 얻지 못하는 요구가 생겨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더욱 깊은 기도 생활을 사모하게 되었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신비한 영적 체험을 갖는 것은 자신을 견고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위에도 매우 극적이고 신비한 영적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그들의 신앙이 체험의 분량만큼 견고하거나 성결하지 못한 것이 늘 의문이었다.
후일 깨닫게 된 바에 의하면 깊이 있는 영적 체험이 그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는 그 체험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분명한 이해를 통하여 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이 청교도들에게는 신령한 은혜 체험과 불건전한 영적 체험의 시금석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나의 경우 첫 번째 예시한 체험은 그렇지 못했으나 두 번째 이후의 체험은 체험할 때 마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일관된 정신을 이해하는 데 말할 수 없는 도움을 주었다.
즉 그러한 체험을 통하여 깨닫게 된 그 성경 본문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 모호하기만 하였던 성경의 진리들이 조목조목 연결을 이루며 커다란 강을 이루면서 흘러가는 "성경 전체의 맥"을 향하여 개안(開眼)을 주었다.
후일 성령의 체험이 가져다 주는 중요한 효과를 바로 '성경 전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주시는 것이'라는 청교도 신학자 죤 오웬(J. Owen)의 논지를 확인하고 매우 기뻤다.
맺는 말
결국 모든 성령 체험이 말씀을 향하여 열린 눈을 갖게 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또한 풍부한 말씀을 가진 설교사역을 가능하게 하고 거룩하고 견고한 삶을 가져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지속적으로 부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내가 늘 좋아하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온 사람의 글과 언어는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체취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말과 글 속에서 숨긴다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 그 체취를 흉내내는 것 만큼이나 어렵습니다. 말씀 사역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성령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