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우리는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 이야기 전체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범위를 좁혀서 두 가진 논점만 들여다보려합니다. 하나는 신상의 금 은 놋 철이 각각 어떤 나라를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거대한 신상을 부서뜨린 뜨인돌에 대해서입니다.
다니엘은 신상의 금 은 놋 철이 제각각 나라(제국)를 의미한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머리 부분인 금이 느부갓네살 왕이라고 말하면서 은과 놋과 철은 뒤이어 일어날 나라들이라고 말했습니다(37-40절). 그런데 은과 놋과 철이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그 나라들이 바벨론에 뒤이어 일어날 것이라고만 했지(39절)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신학자들이 금을 뺀 나머지 세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놓고 갑론을박 했습니다. 대략 세 가지 견해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로 은의 나라는 페르시아를 의미하고, 놋의 나라는 알렉산더 대왕 치하의 헬라(그리스)를 의미하고, 철의 나라는 알렉산더 대왕이 갑자기 죽은 후 헬라제국이 네 나라로 분할되는데 바로 그 네 나라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 둘째로 은의 나라는 메대, 놋의 나라는 페르시아, 철의 나라는 헬라라고 보는 견해가 있고, 셋째로 은의 나라는 메대-페르시아로 보고, 놋의 나라는 그리스, 철의 나라는 헬라 제국을 정복하고 강철같이 강대한 나라를 세우게 되는 로마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처럼 학자들마다, 신학적 관점에 따라 해석이 조금씩 다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이런 해석 방식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금이 바벨론이니까 은은 페르시아고, 놋는 헬라고, 철은 로마다, 이렇게 일대일 대응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축소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통해 보여주신 것은 역사 전체를 통시적으로 보여준 것이지 특정한 시대와 나라의 흥망성쇠를 연대기적으로 보여준 게 아니거든요. 다니엘서는 연대기적인 역사를 예언한 책이 아니에요. 인류의 미래를 예언하는 마야의 달력이라든지, 16세기에 살았던 영국의 마더 쉽톤이 자동차 · 비행기 · 1·2차 세계대전 · 유럽 연합(EU)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했다든지, 16세기 초에 살았던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가 수천 건의 예언을 했는데 그것이 역사적 사건들과 일치한다는 등의 예언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 전체를 한 사람의 인생으로 축약시켜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끔 점집을 찾는데, 점쟁이가 하는 말은 대충 이렇습니다. 당신의 운세는 40세까지는 갖은 고생을 하다가 41세에 대박 날 운세야, 그러니 힘들어도 그때까지만 참아, 그럽니다. 결혼 문제로 고민하는 여자에게는, 당신은 남편 복을 타고났어, 32살에 백마 탄 기사가 나타나, 신부 수업 잘하면서 기다려, 그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인간의 생사화복을 꿰뚫어 아시는 하나님도 그런 식으로 말씀하실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하나님은 점쟁이처럼 남편 복을 타고났다느니, 재물 운이 좋다느니, 몇 세에 대박이 난다느니, 그런 허튼 소리를 하지 않으십니다.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점술가들이 나라의 흥망성쇠를 예언하듯이 말씀하지 않습니다. 몇 년에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망할 것이고, 몇 년에 페르시아가 헬라에 망할 것이고, 몇 년에 헬라가 로마의 의해 망한다는 식으로 예언하지 않으세요. 16세기가 되면 스페인의 국운이 상승할 것이고, 19세기가 되면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될 것이고, 20세기가 되면 미국과 소련이 맞붙을 것이고, 21세기가 되면 중국의 힘이 막강해질 것이라고 예언하지 않으세요.
물론 신상의 머리가 바벨론을 뜻한다는 건 분명히 맞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바벨론이라고 해서 가슴과 팔은 페르시아고, 배와 넓적다리는 헬라고, 다리와 발은 로마라는 식으로 연대기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실 은과 놋과 철의 나라가 어떤 나라냐 하는 것은 다니엘서 2장을 이해하는데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네 나라가 어떤 나라냐가 아니고 ‘넷’이라는 숫자가 갖는 상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계시록은 전형적인 유대 묵시문학에 속하는데, 유대 묵시문학에서 넷이라는 숫자는 ‘전체’(the whole)를 의미합니다.
계시록을 볼까요? 4장에는 하늘 보좌에 네 생물이 앉아 보좌에 앉으신 분을 찬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6-9절). 여기서 네 생물은 단지 네 종류의 생물이 아니고 생명체 전체를 뜻합니다. 또 7장 1절에서는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서서 사방(동서남북)의 바람을 붙잡는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네 모퉁이나 사방(동서남북)은 땅 전체를 뜻합니다.
다니엘서 7장에도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오는 장면이 나옵니다(7:2-3). 여기서도 하늘의 네 바람은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 전체’를 뜻하고, 큰 짐승 넷은 네 왕으로서 ‘역사상의 모든 왕들’을 뜻한다고 보면 됩니다(17절). 다니엘서 2장이 말하는 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금 은 놋 철의 나라를 꼭 네 나라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네 개의 나라로만 보기보다는 역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를 통칭하는 상징적인 숫자로 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것은 저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깊이 있는 구약학자 김회권 목사도 같은 견해를 피력합니다. 그는 다니엘서를 강해하면서 ‘지나칠 정도로 다니엘서와 당대의 역사를 일대일로 대응시키려는 읽기는 바람직하지 않다. 다니엘서 2장에서 말하는 네 나라를 꼭 문자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 성도를 박해하는 무신론적 세계국가는 모두 철과 진흙의 나라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다니엘서는 역사서가 아니라 예언서에 가까운 묵시문서이며, 다니엘서의 미래 예언은 특수한 나라의 정체를 규명하는데 치중하지 않고 나라들과 왕국들의 흥망성쇠를 초월하고 관통하는 하나님의 세계 통치 섭리를 드러내는데 주력하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하나님나라로 읽는 다니엘서, 124-125쪽).
그렇습니다. 다니엘서 2장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 메시지는 네 나라가 어떤 나라냐가 아닙니다. 아무리 강대하고 뛰어난 나라라 할지라도 이 세상의 제국은 결국 뜨인돌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입니다. 때문에 은의 나라, 놋의 나라, 철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니엘서 2장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 메시지만 깊이 새겨들으면 됩니다.
다니엘서 2장에서 최대의 관건은 뜨인돌입니다. 뜨인돌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출처가 분명치 않습니다. 34절에서는 ‘사람이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왔다’고 했고, 45절에서는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는 뜨인돌을 사람이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신상을 부서뜨리기 위해 사람이 그 돌을 던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를 생각해봅시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이 돌을 던져서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삼상17:50). 돌을 던진 사람이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다니엘서에서는 뜨인돌을 만든 사람도 없고, 던진 사람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출처도 없고, 동력인(動力因)도 없어요. 그렇다면 이 신비한 돌의 정체는 과연 뭘까요?
뜨인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먼저 시편 118편 22절을 봅시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죽어 하나님의 집의 모퉁잇돌이 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자신이 곧 건축자가 버린 돌이라고 말씀했습니다(마21:42-44). 물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44절)고 말씀하신 것은 다니엘서가 말하는 뜨인돌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을 아예 산 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벧전2:4).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시온에 한 돌을 두었는데, 그 돌은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사28:16).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사야가 말한 ‘그것을 믿는 이’를 ‘그를 믿는 자’로 의인화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롬9:33). 이사야가 말한 돌이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0)고 말했습니다.
방금 살펴본 것처럼 다니엘서의 뜨인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뜨인돌과 예수님 사이의 유비도 매우 많습니다. 뜨인돌이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도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뜨인돌을 신상을 향해 던진 사람이 없는 것처럼 예수님도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승리하지 않았습니다. 군사의 힘이나 권세의 힘으로 로마를 정복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구원하셨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부활하셨습니다. 뜨인돌에 의해 하나님나라가 세워진 것처럼 예수님이 증거하고 세우신 나라 또한 하나님나라였습니다. 뜨인돌이 신상을 부서뜨리고 온 땅을 뒤덮은 것처럼 예수님의 복음 또한 로마를 가로질러 온 세상으로 전파됐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깊이 새겨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부서지기 쉬운 돌이 거대한 신상을 부서뜨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만들었다는 대목입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어불성설이지요. 세상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12명의 제자를 불러 모으기는 했지만 반로마 군사로 훈련시키거나 혁명적인 정치집단으로 육성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했고, 마지막에는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예,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로마의 권세와 예루살렘의 종교권력에 철저하게 짓밟혔습니다. 완벽하게 패배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랍게도 완전히 패배한 예수가 승리했다고 말합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세상을 구원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십자가의 죽음이 얼마나 위대한 승리인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10-11). 에베소서에서는 “그 능력(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0-23)고 매우 장엄하게 묘사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세우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면서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21:24-27)고 했습니다.
예, 이것은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역설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로마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세상을 뒤집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바보 멍청이도 배꼽을 잡고 웃을 겁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한이 있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가장 비참하고 무력하게 죽는 방식으로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승리를 쟁취하셨습니다. 활 한 번 쏘지 않고, 칼 한 번 뽑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모든 나라와 권세를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진짜 실력입니다. 또한 바로 이것이 역사의 아이러니(irony)요 역설입니다. 세상의 상식으로 볼 때는 도무지 능력 같지 않은 능력인데 그 능력 같지 않은 능력으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금 은 놋 철의 나라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출처도 없고 동력인(動力因)도 없는 뜨인돌이 승리하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요 역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고전1:18).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돌이고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고전1:23-24).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한없이 어리석고 무력한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셨고,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어리석고 무력한 방식으로 세상을 이기고 계십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승리의 길로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다니엘은 말이 안 되는 이 역설에 신앙의 닻을 내렸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통해 보여준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다고 말한 대로, 뜨인돌이 거대한 신상을 부서뜨리고 영원한 승리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 역설에 신앙의 닻을 내렸습니다. 여러분도 말이 안 되는 이 역설에,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이 역설에 신앙의 닻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쟁취하는 승리에다가 삶의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자기 생각의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고, 자기 이익의 협소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용기와 자유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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