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새벽지기1 2016. 3. 27. 08:37

 

“별 일도 없는데, 괜히 눈물이 나요.” 별 일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슬프다는 이 말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입니다. 들리는 소식들은 모두 아프고, 어둡고, 슬프고, 끔찍한 것들뿐입니다. 기쁜 소식을 들어본 적이 언제였던가요?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어떻게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사 40:3) 하나님의 길을 열고 평탄케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 40:6-7) 오늘의 이 어두움이 하나님 책임처럼 들리는 이 말의 진정한 뜻은 따로 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 40:8) 아무리 메말라도, 흉흉해도, 슬퍼도, 깜깜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며, 오직 우리가 가야할 곳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쳤어도 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렇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명령이므로 무조건 행하라는 뜻인 ‘준행하다’의 히브리어 ‘아샤’는, 먼저 행동하면 나중에 그 뜻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준행’은 지고한 묵종입니다. 온 힘을 다해 묵묵히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과 인간은 풀처럼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선포합니다. 줄기차게 말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외에는 해결방안도 소망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그 말씀과 약속을 친히 이루어 가심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는 것은, 교회 일을 열심히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어두운 내 심령에 직통으로 꽂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강력한 화살이 내 심장에 콱 박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암울과 무기력의 피는 다 쏟아지고, 하나님의 위로와 생명력의 피로 교체됩니다. 내가 살아납니다. 움직입니다.

   

초막절 기간이 끝나고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지만, 예루살렘에 남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이 내려다보이는 감람산 언덕에서 하룻밤을 유하시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하나님의 성전에 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인을 개처럼 끌고 와서는 예수님의 발아래 내동댕이쳤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커다란 돌멩이가 하나씩 들려 있었고, 분기는 탱천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5)

   

그날 아침 성전 앞마당에는 죄악과 살기와 비판과 악의만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만이 아닙니다. 그 시대 전체가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 유대 땅에 오신 이유는, 인류가 겪었고 당해야 할 모든 고통이 가장 극렬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던 시대와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모두 그 문제들을 어떻게 대처하고, 이기고, 해결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절대로 어둠에 다니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물리치는 생명의 빛이 된다는 약속입니다.

   

거짓과 악의가 판치는 세상과 누구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시대는 실은 ‘예수님의 제자’, 곧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기 위한 여정의 출발점입니다.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는 세상을 뒤로 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나러 출발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로의 도피가 아닙니다. 전혀 새로운 삶의 위대한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하신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이 말씀은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오류나 죄는 뒤로하고, 남의 잘못에 대한 분노와 비판에 몰두합니다. 그렇다고 잘못을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자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분노와 비판은 두 개의 무덤을 만듭니다. 상대방과 나의 무덤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먼저 보라하신 이유는 내가 분노의 무덤에 빠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함께 매몰되면 세상은 정말 소망이 없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불의에 대한 분노와 비판에서 선한 것의 추구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황무지’를 통해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 T.S. 엘리엇이 회심한 후에 모든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세상을 황무지로 보는가, 아니면 아름다운 정원으로 보는가? 네...세상은 광야요 사막이요 살기 어려운 황무지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정원으로, 거룩한 땅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유진 피터슨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우리의 동기가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하나님보다 상황에 반응한다면 결국 우리가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C.S. 루이스의 말을 잊지 마십시오. “온 세상의 악을 다 모은다고 해도 그것은 대양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잉크보다도 작다.” 아무리 지구에 악이 횡행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에는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그 하나님이 여전히 통치하고 계십니다.

   

얼마든지 분노할 수 있습니다.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내 손에 이 들려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참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나 언제라도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진정한 것들은 경이로움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암울한 시대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지금의 우리들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돌에 맞아 비참하게 죽어야 할 그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이 말씀은 그 여인 역시 왕 같은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고하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 자신과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돌에 맞아죽어야 하는 그 여인의 일로 복잡한 일이 이미 생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앞에 서자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무시무시한 십자가는 모든 이야기를 끝내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도 예수님의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십자가를 통하여 전혀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리 깜깜한 상황도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를 끝으로 데려가지 못합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으로 데려갑니다. 지금이 바로 다시 시작해야 할 그 때입니다. 고개를 드십시오. 그리고 돌을 내려놓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