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믿음은 허상이 아닌 실상입니다

새벽지기1 2016. 3. 26. 07:46

래프팅은 급류를 타며 스릴을 즐기는 레포츠입니다. 각 보트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잔잔한 물가에 머물기도 하고, 몇 번이고 급류를 타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짜릿한 스릴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급류에 보트가 뒤집히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며, 연신 고개를 숙이고 벌벌 떠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의 삶은 시선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래프팅을 할 때, 발은 발을 끼우는 안전띠를 의지해야 하지만, 시선은 먼 전경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맞추어 살아가야만 삶이 안전합니다.

   

믿음의 시선은 삶의 내용을 지니고 나타나는데, 그것 또한 믿음의 이해에 따라 달라집니다. 성경에서는 믿음이 ‘하나’(엡 4:5)라고 했는데, 그 믿음이 각자의 삶에서 표현될 때는 각각의 성격에 맞는 다양한 옷을 갈아입고 나타납니다. 이러한 “믿음의 스펙트럼”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 속에 들어가 역사할 때,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부정적 또는 긍정적 삶의 양상으로 나타남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다양한 삶의 양식으로 안내하는 ‘믿음’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상’이라 말합니다. ‘실상’은 원어로 ’휘포스타시스(hypostasis)’라고 하는데, 크게 ‘실재’와 ‘확신’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실상이란 말 속에 실재와 확신이라는 뜻이 들어있음을 감안해 본다면, 믿음의 개념을 두 가지로 풀어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에 대한 ‘확신’과 관련되어 있고, 소망하는 것들의 ‘실재’라고 할 수 있는 현재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실재’라는 것은 확신을 통해 경험하는 현실이고, ‘확신’이라는 것은 미래의 것을 미리 맛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히브리서 11장 1-2절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의 표현으로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미래적인 약속에 대한 소망을 믿음으로 실재가 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사진을 찍을 때 아무리 좋은 카메라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 안에 필름기능, 즉 저장기능을 하는 칩이 없다면, 어떤 사진도 찍어 남길 수 없습니다. 믿음은 저장 기능, 저장 능력과 연관됩니다. 기대하는 이미지를 우리 눈으로 확인하도록 가능하게 하는 이미지 자체가 믿음입니다. 믿음은 사진을 찍은 것이 이미 거기에 내장되어 있다고 믿고, 찍은 대로 나오기를 바라는 것의 ‘실상’, 즉 실제적인 이미지입니다.

   

믿음은 꿈을 꾸었을 때처럼, 잠시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가 사라지는 허상이 아닙니다. 자기의 현재 상태를 턱없이 크게 과장해서 사실인 것처럼 믿는 그러한 과대망상도 아닙니다. 가상의 허울이 벗겨진, 본래 모습의 실상입니다. 기대하고 바라는 것의 실재입니다. 실재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요, 인간의 의식에서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입니다.

   

실상으로서의 믿음을 ‘하나님’과 연관시켜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알고, 그 분과 실제로 관계를 맺는 것이 믿음이요 또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이 땅에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본 적이 없는 ‘하나님’으로 알고, 그 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믿음이요 믿음의 행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관계도 정상적으로 열어줍니다.

   

또한 믿음을 일상과 연관 지어 생각해 봅니다. 일상적인 일에서 수고의 결과가 눈으로 보일 때와 눈으로 보이지 않을 때, 삶으로 나타나는 믿음의 모습은 서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어떠한 상황이든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 믿음의 순도와 진정성이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평상시 믿음의 훈련은 중요합니다. 간혹 성도들 가운데 앞이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상황일 때도 자신의 믿음을 잃지 않는 분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 이후는 믿음의 선조들이 여러 명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언급하기 전에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창조’를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창조’의 관계가 그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3절에서는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믿음으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피스티스’, 그리고 ‘믿음으로’‘피스테이’ 입니다. 이 ‘믿음으로’란 말은 히브리서 11장에서 무려 18번이나 반복됩니다. 히브리서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핵심 되는 용어가 바로 “믿음으로”입니다. 보이는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분”이었다고 믿는 것이 창조의 믿음입니다. 무의 혼돈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으로’ 인정한 것을 ‘믿음대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실 때 자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믿음의 선언이요 요청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능력 사용에 대한 주님 자신의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능력이나 성부 하나님의 능력만을 사용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실 때는 ‘너는 내가 이것을 할 것을 믿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주님의 능력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의 능력을 묻는 말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믿음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능력을 사용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왜곡하고, 아전인수 격으로 이해하여 허상의 믿음과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은 바로 ‘자족의 능력’입니다. 이는 첫째, 이전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할 수 있게 된 능력이고, 둘째, 지금까지 행한 일들을 할 수 없게 된 능력입니다. 이제는 ‘비천이나 궁핍에도’(빌 4:12) 처할 줄 알게 되었고, 반면에 자신이 행해왔던 악행들과 갈등하는 현실이 된 그런 능력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이 하신 말씀의 신실하심, 세상과 세상사를 다스리심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들을 증명하거나 시험하는 수단입니다. “믿음은 허상이 아니요, 실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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