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바케트라는 사람이 쓴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내용은 대충 이런 것입니다.
무대는 시골길. 앙상한 나무가 한 그루 서있을 뿐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나무 아래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떠돌이 사나이가 실없는 수작과 부질없는 행위를 하면서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 포조와 럭키라는 기이한 두 사나이가 나타나 한데 어울리다가 사라집니다. 잠시 후 한 소년이 “고도씨가 오늘밤에는 못 오고 내일은 꼭 온답니다.”는 말을 전하고 가 버립니다. 이것이 1막입니다. 제2막은 그 다음날로 제1막과 거의 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마지막에 또 소년이 나타나 “고도씨는 오늘 밤에 못 오고 내일은 꼭 온답니다.”라는 말을 전하고 사라집니다. 밑도 끝도 없는 내용의 이 연극은, 사람들이 자기 일에 열중하다가는 가끔 고도가 언제 오느냐고 서로에게 묻고는 끝납니다.
이 연극은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란 누구인가에 대해 열띤 논의가 있는데. Godot가 God와 음이 비슷해 그들이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우리들도 이제나 저제나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 내 삶의 난제들을 쌈박하게 해결하셔서 행복하고 신나게 살 때를 기다립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름을 높이라는 형제들의 제안을 일축하셨습니다. 그런데 초막절 중간에 비밀리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안 가신다고 해놓고 어인 일일까요? 그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 7:18)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자신의 이름을 만방에 알리기 위함은 아닙니다. 짐작해 보자면, 3대 절기에는 12살 이상의 모든 유대 남자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야합니다. 그래서 마을은 텅 비었고,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6개월 앞두고 있기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초막절에 모인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각각이었습니다.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요7:12)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성전에서 복음을 가르치실 때,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기이히 여기며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님의 신분과 학벌을 평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유대교 당국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유대 랍비들은 다니엘 9:25, 말라기 3:1 등을 인용하며, 예수님은 갑자기 출현하신 것도 아니고,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을 다 알기 때문에 구원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을 보면, 구원자가 분명하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요7:31)
그렇게 수많은 말들이 오가고, 초막절 마지막 날이 저물었습니다. 길고 긴 요한복음 7장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각자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모두 메시야는 언제 쯤 오실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며칠 동안 그들 옆에, 가장 가까이에 계셨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영지주의자란 이단이 있었습니다. ‘영지’란 헬라어 ‘그노시스’로 ‘모든 것을 아는’이란 엄청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헬라철학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설명한 사람들인데 수많은 하나님에 대한 말을 쏟아냈고,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단입니다. 그들은 장황한 글들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모두 다 빗나간 지식들의 단순한 나열이었습니다.
그들이 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에 대한 경배이며, 기도란 그분과의 대화입니다. 예배와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그저 이야깃거리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태도, 마음가짐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과 교회와 목사들과 사람들에 대한 공론만 일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할 때 하나님의 영광과 그 고귀한 선물들이 하찮은 것으로, 잡담거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오순절 날 성령께서 이 땅에 임하셔서,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시공의 제한을 받으셨던 성자 예수님 대신,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또 다시 성령하나님을 공론화시켜 버립니다. 성령세례의 증거로 방언해야 한다, 능력을 받아야 한다, 성령세례 다음에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한다는 등등. 그 말에 사람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받았다고 목에 힘주고, 못 받았다고 고개를 떨굽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
그래,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또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번 살아보자.”라고 결단한 사람들은 이미 성령 세례를 받았고, 하나님나라가 그 안에 자리 잡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공부하고 외우는 지식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단 한 개만 살아내도, 삶은 생명을 얻고 나날이 풍성해 집니다.
인도의 간디는 원래 눈을 요리조리 굴리며 기회를 노리는 생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분의 가르침 중 하나인 ‘무저항 비폭력’을 집요하게 살아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저항하지 않고 당했으며, 어떤 폭력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으로부터 조국 인도를 해방시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것들로 대체되는 시간입니다. 그 자세로 예배에 임할 때마다 우리들의 영성은 고양되고, 지성은 하나님의 생각으로 새로워지고, 온 몸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성품, 그분의 방식에 친숙해집니다. 그렇게 예배로 새로워진 우리는 다시 세상을 향해 출발합니다.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매 순간과 상황과 위기와 호기를 기도로 대처합니다. 기도로 하나님께 내 상한 심령을 토로하고, 감사하며, 상의하고, 지혜와 능력을 구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노라면 어느새 내 곁에서 나를 돕고 계시는 성령 하나님이 보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단지 하나님께 미소하며,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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