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형익목사

교양 그리고 겸손과 온유 /김형익목사

새벽지기1 2016. 3. 25. 12:22

 

교양 그리고 겸손과 온유

 

 

역사에 민주주의가 발달하기 전에는 사람마다 그 신분에 따라 값이 매겨지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문화적, 인습적으로는 그런 것이 존재하기도 합니다마는, 그전에는 신분과 계층이 사회의 규범을 이루었습니다. 귀족은 nobles이라고 했고, 천민은 the humble 또는 the lowly 라고 칭하였습니다.

교양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교육받은’ 혹은 ‘세련된’ 등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가지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양은 무엇일까요? 아무 것도 아니지요. 교회 안에서 교양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믿음일 뿐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 기억하시지요? 하나님 앞에서는 noble한 사람은 있을 수 없고, 오직 모두가 다 humble 하고 lowly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유대의 왕통이기는 하였으나 이미 몰락한 왕국이며 로마의 식민지에 불과한 지역의 왕통이었습니다. 그는 천민 중 하나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피를 나눈 것은 아니시지만 육신 아버지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태어난 곳은 고급병원의 1등실이 아니라, 여관에 딸린 축사였으며, 처음으로 누우신 곳은 말의 먹이통이었습니다. 적어도 나이가 30이 되기까지 그분은 요셉을 이어 목수로 성장하였습니다. 제대로 된 공식 교육—교양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천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세상에 오셔야만 할 특별한 구속적인(redemptive) 이유가 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저 평범한 중산층으로 오셔도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하나님이신데, 왕궁에 왕자로 오신다 한들 그것이 뭐 그리 문제가 되겠는가?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머리를 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란 사실에서 생각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기 위해서도 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죄인의 구주가 되시기에 합당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했기에,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그분에게 나아오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분이 노동자의 삶을 살며 천대도 받으셨기에 사회적 신분의 부담으로 그분에게 나아오지 못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가능한 한 가난하게 그리고 가능한 한 천하게 오시기로 정하신 하나님의 방법은 모두를 구별없이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세심한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온유를 살아내셨습니다.

교양이 아니라 겸손과 온유가 신앙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겸손와 온유는 참 잘 어울리는 짝입니다. 수년 전 태국의 촌부리 선교센터를 방문했을 때, 김정웅 선교사님께서 야외수영장 공사를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그 넓은 곳에서 수영장을 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은 어디서 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옆에 큰 저수지같은 것이 있는데 그보다 조금 낮게 수영장을 파면 그 물들이 힘들이지 않고 흘러들어올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 때, 제 머리를 치는 것이, ‘아, 이것이 겸손과 온유다’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더 낮아지면 힘들지 않게 사람들이 다가오고 몰려옵니다. 겸손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아래서 섬기는 것입니다. 온유는 다가올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생 때, 한국의 목사님들에게 강해설교를 가르쳐서 영향을 미친 데니스 레인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 잊었지만, 한 가지 유일하게 제 기억에서 없어지지 않는 것은 온유에 대한 그분의 정의였습니다. 온유는 ‘approachable’한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지요. 겸손과 온유는 그래서 어울리는 짝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교만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다가가기가 싫지요. 이유는 우리 자신이 본질적으로 교만하기 때문입니다(정신과의사이자 선교사였고 미국 IVF의 총무를 했던 존 화이트의 말입니다). 겸손한 척 하는 사람이 아니라 참 겸손한 사람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부담없이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옵니다.

예수님의 삶이 이것을 완벽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셨지만, 세리나 창녀와 같은 사람들이 그분에게 나아오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교양있는 사람들은 물론 팔레스타인의 빈민들이 그에게 나아왔고, 어린 아이들이 그분에게 나아왔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그런 겸손과 온유를 잘 드러내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그런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밖에서 만난 어떤 분이 ‘그 교회는 문턱이 높다면서요?’ 라고 하신 말씀이 마음에 걸립니다. 내가 더 겸손해지고 더 온유해지도록 도와주십시오 라고 하나님 앞에 날마다 나아갑니다. 목사로서 참으로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면서, ‘함께 가자’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겸손한 그리스도인 그리고 온유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저의 기도의 제목이며 목회의 소원입니다. 그분을 닮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