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그 분의 음성을 들을 때

새벽지기1 2016. 3. 19. 08:37

   

미시간 주 시골 태생의 한 소녀는 사사건건 간섭하는 아버지에 반발하고, 가출 하여 멀리 디트로이트로 도망을 갑니다. 이튿날 소녀는 지금까지 본 것 중 제일 큰 차를 몰고 다니는 한 친절한 신사를 만났는데, 그는 소녀가 지금까지 누려본 적이 없는 온갖 좋은 것을 다 해주었습니다. 정말 가출하기 잘했다 생각하며 신나고 행복한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짐작대로 인신매매범이었습니다. 마약과 매춘으로 1년 여 만에 몸이 망가졌고, 소녀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며칠 동안 굶으며 거리를 방황하던 소녀의 입에서 신음처럼 흘러나온 말은 “하나님, 제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 집 개도 나보다 잘 먹는데...” 용기를 내어 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걸고 끊기를 수차례, 드디어 자동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아빠 엄마, 저에요. 집에 갈지도 몰라요. 가게 되면 자정 쯤 도착할거에요. 아빠 엄마가 없으면 그냥 버스에 앉아 지나갈래요.”

  

버스에 올라 집으로 가는 일곱 시간 내내 온갖 근심과 상념들이 떠올랐습니다. “엄마 아빠가 나오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드디어 자신이 살던 마을의 터미널에 도착하였습니다. 운전기사가 말했습니다. “정차시간은 15분입니다.” 소녀의 인생을 판가름 할 운명의 15분, 몰라보게 변해버린 얼굴의 화장을 열심히 지우며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머뭇머뭇 터미널 건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목도하게 됩니다.

   

밤 열두 시의 작은 시골 버스 터미널은 여기저기 걸린 ‘환영’이라고 쓴 현수막에 우스꽝스런 파티 복장을 한 엄마 아빠를 포함, 무려 사십 명이나 되는 일가친척들이 다 나와 있었고 소녀를 보자 모두 요란한 악기를 불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눈물은 하염없이 흐르고...다가온 아버지에게 소녀가 말했습니다. “아빠, 죄송해요” 아빠가 말했습니다. “쉿! 용서를 빌 시간이 없어, 파티에 늦을라. 집에 잔치가 준비되어 있거든.” - 20세기 탕자의 비유라 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필립 얀시의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정반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잘못을 했으면 응당 벌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종들도 굶지 않는데...”라며 집으로 돌아온 탕자(눅15:17)나 “우리 집 개도 나보다 잘 먹는데...”라며 집으로 발길을 돌린 그 소녀의 의도는 가련하고 누추하기 짝이 없는 의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이십니다. 받아들이는 정도를 넘어 뛸 듯이 기뻐하십니다. 시인 조지 허버트가 말합니다. “인간에게서 은혜를 빼면 얼마나 초라한 존재가 되는가.”

  

그러므로 어떤 의도로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나가면 됩니다. 이 때 중요한 것 두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방법대로 하는 것이고 둘째, 이제는 은혜의 통로가 되리라 결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로지 사람을 통해서, 이 땅에 임합니다. 은혜의 통로가 되는 일은 숙제가 아닙니다. 신나는 일입니다. 은혜의 통로가 되리라는 마음만 먹어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리라.”(요5:21) 예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신과 동일시하고 계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세 위격이나, 한 분이시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수많은 설명이 있지만 그 신비를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참여한 나는 당연히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은, 온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 우리가 사는 땅에 오셔서 구체적인 구원을 이루시는 성자 예수님, 오늘도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교회를 이루시고 자신의 말씀과 행위를 증언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일에 오늘, 각자의 자리에서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5:23) ‘공경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티마오’‘명예롭게 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명예롭게 한다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경배와 찬양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말로만 명예롭게 하는 것은 ‘아부’입니다. 진정한 명예는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분의 가르침을 살 때만 가능합니다. 즉 ‘티마오’는 삶으로서의 존경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참여’한다는 것은 인격적인 교제, 구체적인 삶의 공유를 의미합니다. 유진 피터슨이 말합니다. “예수님을 이미지로 축소시키면 더 이상 예수님과 대면하지 않게 됩니다. 인격이 없는 이미지는 아무런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나와 가장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이 자체가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탕자도, 잃은 양도, 미시간 시골 소녀도, 우리들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무조건 받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자리에 앉아 관리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한 그분을 알현하기 위해서 천사나 목사를 거쳐야 하는 비인격적인 그런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아무리 십자가를 높이 세워놨어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목사나 사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잘못된 기독교, 잘못된 교회입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5:14) 38년 된 베데스다의 병자에게, 가출했던 그 소녀에게,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살리는 일을 신나게 하다보면 어느새 자랑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 은혜와 복을 누리고, 베풀며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