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사람처럼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는 아마 없을 겁니다. 사람은 한없이 복잡하고 미묘한 존재라서 작은 일에도 잘 흔들리고 상처를 받습니다. 여러분도 살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마음의 상처, 영혼의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한 번 뒤돌아보십시오. 살아오면서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오를 때가 어느 때였습니까? 견딜 수 없을 만큼 존재와 삶이 비참해질 때가 어느 때였습니까? 사는 것 자체를 아예 포기해버리고 싶을 만큼 치욕스러울 때가 어느 때였습니까? 아마 이런 때였을 겁니다. 내가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 무시당한다고 느껴질 때, 누군가가 나를 함부로 대한다고 느껴질 때였을 겁니다. 사실입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무시를 당하는 것처럼 비참하고 더럽고 치욕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무시당했을 때, 아내가 남편에게 무시당했을 때, 학생이 선생님께 무시당했을 때, 선생님이 학생에게 무시당했을 때, 직장 상사가 자기 맘대로 지시하고 자기 맘대로 판단한다 싶을 때 사람은 가장 심한 모멸감과 비참함을 느낍니다. 요즘 [도가니]라는 영화가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고 분노하는 것도 선생님이 장애인 학생들을 함부로 대한 것 때문입니다. 장애로 인해 고통 받는 학생들을 존중해야 할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어주기는커녕 더 무시하고, 자기들 맘대로 성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인권 후진국입니다. 조금만 부족한 게 있다 싶으면 무시하고 차별하는 ‘무시문화’가 거의 체질화되어 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부터 그럽니다. 유치원 아이들이 뭘 알겠습니까? 그런데도 자기보다 조금만 못한다 싶으면 금방 무시합니다. 자기보다 공부를 못해도 무시하고, 자기보다 가난해도 무시합니다. 얼굴이 못생겨도 무시하고, 뚱뚱해도 무시합니다. 아예 함께 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아이뿐 아닙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사회 전체가 다 ‘무시문화’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쉽게 차별하고, 쉽게 무시합니다.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말이 온통 욕입니다. 최근에 학생들의 언어생활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서 호주머니에 녹음기를 넣어놓고 실험을 했습니다. 언어가 다 욕입니다. 최근에 학생들의 언어생활을 조사했는데, 학생 한 사람이 4시간 동안에 평균 385번의 욕을 한다고 합니다. 75초에 한 번씩 욕이 튀어난 나온 셈입니다. 비하, 차별, 무시, 이런 게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중의 문화’가 없습니다. 우리네 인생살이가 팍팍하고 힘든 것도 깊이 따지고 보면 ‘존중의 문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들 경제가 어려워서 살기 힘들다고 푸념합니다만, 사실은 경제보다는 툭하면 욕하고, 차별하고, 무시하는 이 ‘무시문화’ 때문에 사는 게 힘든 겁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봅시다. 왜 ‘무시문화’가 이렇게 극성을 부리는 것일까요? ‘무시문화’가 극성을 부리게 된 배경이 무엇일까요? 저는 우리 고유의 유교문화, 군대문화, 패거리문화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유유서의 유교문화, 상명하복의 군대문화, ‘우리가 남이가’라는 패거리문화가 ‘무시문화’를 낳은 주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부모의 명령, 국가의 명령, 상관의 명령, 선배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명령과 복종이라는 수직 구조가 한국사회 전반을 오랫동안 지배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뭘 보고 자랐겠습니까? 어른들이 무시하는 것 보고 자랐습니다. 끊임없이 무시당하면서 자랐습니다. 이렇게 무시하는 문화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커서도 무시하는 문화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일차적인 요인에 불과합니다. 사회학적으로는 이렇게 진단할 수 있지만 저는 사회학자가 아닙니다. 저는 성경에서 근원적인 요인을 찾아보려 합니다. 성경은 ‘무시문화’의 뿌리가 사랑의 부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제 진단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진단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사랑은 온유하다고.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다고.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믿는다고. 그러면 이걸 한 번 뒤집어봅시다.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오래 참지 않습니다. 교만합니다. 무례히 행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합니다. 쉽게 성냅니다. 악한 것을 생각합니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무시문화’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무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 화를 잘 낸다고 해봅시다. 다른 사람에게는 잘 참아주는데, 유독 그 사람에게는 잘 참아주지 않고 화를 낸다고 해봅시다. 그 사람이 앞에 있는데도 거리낌 없이 내 유익을 추구하고, 악한 것을 생각하고, 무례하게 행동한다고 해봅시다. 왜 그럴까요? 그 사람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찮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상대방을 존중한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겠지요. 쉽게 화내지 않을 겁니다. 쉽게 약속을 어기지 않을 겁니다. 무례하게 행동할 수도 없을 겁니다. 대놓고 내 유익을 구하지도 않을 겁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그 사람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화내고, 무시하고, 내 유익을 구하고, 무례히 행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 이것이 ‘무시문화’의 뿌리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대강령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요약했습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뜻의 핵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 이걸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은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사람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지요? 그런데 사실은 별 것 아닌 이것이 사랑입니다.
유대인 랍비 힐렐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교도가 힐렐에게 와서는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토라의 내용을 모두 가르쳐 준다면 유대교로 개종하겠습니다.” 그러자 힐렐이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당신이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토라 내용의 전부요. 나머지는 그에 대한 해설에 지나지 않으니 가서 토라를 공부하시오.” 여러분,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실은 ‘사람을 잘 대하라’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이기도 하고, 종교적이기도 하고, 심오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을 존중하라’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이 어떤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배는 잘 드리는데 사람을 차별하고,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제대로 된 신앙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예배를 열심히 드릴지라도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지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매우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여기서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형제 사랑이 하나님 사랑의 바로미터라는 거예요. 예수님도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마18:5-6). 이런 말씀도 했습니다. “헐벗은 자를 입히고, 갇힌 자를 자유케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이 말씀은 동학사상을 연상시킵니다. 동학사상의 핵심이 인내천(人乃天)인데요, 인내천(人乃天)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성경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적으로 보면 사랑과 존중은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봅시다.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을 정말 존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겠습니까?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충분히 공급해주는 것일까요? 그 사람이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것일까요? 끝없이 용납하고 받아주는 것일까요? 어쩌면 다들 이런 걸 사랑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끝없이 들어주고, 끝없이 받아주고, 끝없이 퍼주는 것이야말로 정말 굉장한 사랑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이런 것들보다 훨씬 심오하고 근원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의 자유의지와 깊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나의 자유의지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그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어야만 비로소 사랑일 수 있습니다. 만일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사랑일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사랑일 수 없습니다. 설사 내게 있는 모든 것을 털어 구제한다 할지라도,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할지라도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옷을 입은 폭력이지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오직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그 자유의지를 존중해줄 때에만 사랑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첫째로 내 자유의지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둘째로 너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조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당신의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더욱이 그분은 전능자이십니다. 말씀만 하시면 모든 것이 가능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쉼 없이 돌아오라고 입이 닳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강제력을 발동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강제로 우리를 회개하게 하거나 구원으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리석게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심히 아파하시면서도 우리의 자유의지를 침범해가면서까지 개입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자유의지를 짓밟지 않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왜 주권자이신 그분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의 자유의지를 짓밟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폭력이지 사랑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사람입니다. 파스칼은 사람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해도 자유의지가 없어보십시오. 사람은 생각하는 기계밖에 안 됩니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의지는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절대 조건입니다. 또 사랑이 사랑일 수 있는 절대 조건이기도 합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사랑은 잘 입히고, 잘 먹이고, 잘 해주는 것보다 훨씬 심오하고 근원적인 일입니다. 내 자유의지를 가지고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물론 이것이 사랑의 전부는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것보다 더 깊고, 더 높고, 더 큽니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것 없이는 사랑이 싹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너무 쉽게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짓밟습니다. 선배라는 이름으로 짓밟고, 남자라는 이름으로 짓밟고, 상사라는 이름으로 짓밟고, 부모라는 이름으로 짓밟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짓밟습니다. ‘내가 널 사랑하니까, 내가 선배니까, 내가 인생 더 살았으니까, 내가 월급 주는 사람이니까, 내가 부모니까 너는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다들 이런 범주에서 살아갑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이 옥죄고, 더 많이 강요합니다. 강요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아들 다운이를 키울 때 그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픈데요, 아빠라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다운이의 지유의지를 많이 무시했습니다.
사람은 제각각 기질이 다르고 스타일이 다릅니다. 옷 입는 것 하나도 다 다릅니다. 색깔의 취향도 다르고, 디자인의 취향도 다릅니다. 그런데 자식이라고 해서 부모 취향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합니까? 아내라고 해서 남편의 취향에 맞춰야 합니까? 물론 남편의 취향을 고려할 수는 있겠지요. 사실 남편의 취향을 고려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남편의 취향을 강요해서도 안 되고, 남편의 취향에 매여서도 안 됩니다. 내가 좀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해서 함부로 강요하는 것은 사람을 사람으로서 존중하지 않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힘으로, 권력으로, 사랑으로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밥 먹듯 무시하며 짓밟아왔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랑’, 그러면 바로 ‘희생’과 ‘헌신’을 떠올렸습니다.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희생하고 헌신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 없는 희생, 사랑 없는 헌신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랑 없는 희생, 사랑 없는 헌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상대방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희생과 헌신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희생과 헌신 이전에 상대방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대방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고, 사랑의 뿌리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하라고 말합니다.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절대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사랑,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에 기초한 사랑을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사랑은 영원히 소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랑은 믿음이나 소망보다도 더 값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한 번 그렇게 살아봅시다. 서로를 정말 가슴으로 존중하면서 살아봅시다.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침탈하거나 꺾지 않는 그런 삶을 한 번 연습해봅시다. 물론 우리 안에는 무시문화가 너무 깊이 침투해있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또 위험성이 없지도 않습니다. 존중의 문화는 자칫 외식(겉치레)으로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서로 다가가기보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피차 간섭하지 않는 아주 차가운 형식적 관계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자칫 하면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되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은 ‘차가운 존중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교회는 차가운 존중의 문화가 아니라 ‘따뜻한 존중의 문화’가 피어나야 합니다. 피차 간섭하지 않는 존중의 문화가 아니라 소통하는 존중의 문화가 피어나야 합니다(1박수련회). 우리 함께 말씀샘교회 안에서 따뜻한 존중의 문화, 소통하는 존중의 문화를 꽃피워 봅시다.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린 고질적인 ‘무시문화’를 뽑아버리고 ‘존중의 문화’를 심어봅시다. 마음 다해 배우고 익혀봅시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존중의 문화’라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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