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권인목사

역사를 가르는 네 개의 동사 (출1–2장) / 신권인 목사

새벽지기1 2026. 5. 7. 10:47

역사를 가르는 네 개의 동사 (출1–2장) 

역사는 사건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라진다. 출애굽기 1–2장은 이 갈림길을 네 개의 동사를 통해 하나님을 증언한다. 하나님이 들으셨다. 하나님이 기억하셨다. 하나님이 보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셨다. 이 네 개의 동사는 단순한 서술이 아니다. 그것은 두 세계의 충돌이다. 외면(turning away)으로 유지되는 세계와 개입(divine intervention)으로 완성되는 세계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동사의 주어는 한결같이 하나님(엘로힘)이시다. 한글 번역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원문은 매 문장마다 하나님을 반복(출2:24-25)함으로써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집요하게 각인시킨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1. 알지 않으려는 권력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이 한 문장은 단순한 정치적 변화나 정권 교체가 아니다. 이것은 무지가 아니다. 의도된 거부다. 알지 않음은 관계를 끊는 선택이다. 알게 되면 관계가 생기고, 관계가 생기면 책임이 따른다. 그래서 인간은 잊는다. 권력은 외면하고 지운다. 알 수 있었으나 알지 않기로 한 의지, 기억할 수 있었으나 지워버린 결단이다. 기억을 지우고, 관계를 끊고, 타자를 위협으로 재구성한다. 억압은 힘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관계를 거부하는 앎의 포기에서 시작된다. 알지 못하는 권력 아래에서는 고통이 구조가 된다. 보지 않으려는 눈, 듣지 않으려는 귀, 기억하지 않으려는 마음, 이것이 억압의 시작이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은 단지 기억을 지운 것이 아니다. 그는 시선을 바꾸었다. 그는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확대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에게 더 이상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웃이 아니었고, 그들은 숫자로 환원되었고, 위협으로 재해석되었다. 1장 9절의 말씀에는 "보라"(Look)라는 단어가 기록되었다. 이 말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다. 그것은 해석된 시선이다.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그 결론에 맞게 현실을 재구성하는 눈이다. 그리고 그 선택된 시선은 현실을 왜곡할 뿐 아니라, 새로운 고통의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외면의 힘이다. 억압은 눈을 감는 데서 시작된다. 보지 않기로 한 순간, 이미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2. 아시는 하나님 

인간이 알지 않으려 할 때, 하나님은 아신다. 그분의 아심은 정보가 아니라 관계이며,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다. 아심은 멈추지 않는다. 반드시 움직인다. 아심은 사랑의 개입이다. 하나님은 아시고, 외면하지 않으시며, 끝내 구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일관성이며,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다. 하나님은 시작하신 구원을 끝까지 책임지고 이루시는 분이시다. 구원은 인간의 각성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앎에서 시작된다. 

3. 듣지 않으려는 귀 

고통은 소리를 낸다. 그러나 세상은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 한다. 세상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보다 들으려하지 않는 귀가 더 많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다. 히브리어 Shama는 '듣고 응답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은 듣지 않으려 한다. 들어버리면 불편하게 만들고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들어버리면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해야하기 때문이다. 듣지 않음은 책임을 피하는 선택이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종종 억압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은 작지 않았다. 그것은 노예의 신음이었고, 생존을 향한 절규였으며,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기도였다. 그러나 권력은 그 소리를 듣지 않았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은 단지 기억을 지운 존재가 아니라, 그 소리를 차단한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종종 억압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듣지 않는 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방식으로 고통을 외면한다.

4. 들으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신음은 땅에 묻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소리가 얼마나 크냐가 아니라, 누가 그것을 들으려 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갈라진다. 사람은 듣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들으셨다. 들으심은 응답의 시작이다. 사람들은 보지 못했고, 권력은 듣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들으셨다. 세계의 권력이 귀를 막을 때, 하나님은 고통의 주파수에 귀를 맞추시고 들으심으로써 인간의 침묵을 깨뜨리셨다. 

5. 기억하지 않으려는 인간 

기억은 과거의 보존이 아니다. 현재를 규정하고 미래를 여는 힘이다. 그러나 인간은 잊는다. 아니, 지운다. 기억을 선택적으로 사용한다. 기억하면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관계를 불러온다. 요셉은 한 시대를 살려낸 기억이었으나, 그 기억은 제거되고 인간의 존엄은 삭제되었다. 기억하지 않음은 은혜를 지우는 선택이다. 망각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종종 의도된 구조다. 그리고 그 구조 속에서 은혜는 지워지고, 존재는 위협으로 바뀐다. 이스라엘을 향한 억압은 힘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망각에서 시작되었다. 기억을 잃은 권력은 과거의 은혜를 현재의 위협으로 재해석한다. 이것이 망각의 재구성이다. 

6. 기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신다. 이 기억은 언약의 실행이다. 하나님이 기억하실 때, 역사는 방향을 얻는다. 인간이 지운 것을 하나님은 다시 불러내시고, 끊어진 것을 다시 이어 붙이신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인류의 구속사는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것을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이다. 하나님의 기억하심은 인간의 망각을 무너뜨리고. 인간이 지워버린 역사를 다시 불러내시며, 인간이 끊어버린 관계를 다시 이어 붙이신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참된 믿음은 기억의 문제이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기억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게 된다. 

7. 보지 않으려는 눈

세상은 보지 못하는 눈보다 보지 않으려는 눈이 더 많다. 보지 못함은 한계이지만, 보지 않음은 선택이다. 보지 못하는 것보다 보지 않으려는 것이 더 위험하다. 권력은 시선을 재구성한다. 이것은 관찰이 아니다.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시선이다.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된다. 그래서 억압은 눈을 감는 데서 시작된다. 보지 않음은 현실을 왜곡하는 선택이다. 외면하는 순간, 이미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8. 보시는 하나님 

고통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로 드러나느냐, 아니면 침묵 속에 묻히느냐는 누가 그것을 보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보셨다"는 말은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개입의 시작이며, 구원의 전조이다. 신앙은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선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선을 가진다는 것은 더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보려는 용기, 직면하려는 의지, 그리고 그로 인해 감당해야 할 책임. 이 세 가지가 함께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보시는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은 지금도 보고 계신다. 그리고 그 보심은 여전히 구원을 향하고 있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눈을 뜰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외면할 것인가? 

결론

인간은 알지 않음으로 관계를 끊고, 듣지 않음으로 책임을 피하며, 기억하지 않음으로 은혜를 지우고, 보지 않음으로 현실을 왜곡한다. 오늘 우리 역시 이 경계 위에 서 있다.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반복되는 구조이다. 오늘도 우리는 선택한다. 신앙은 새로운 정보를 더 많이 얻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귀를 여는 것이다. 신앙은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을 함께 듣는 것이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고통, 하나님이 귀 기울이시는 신음,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시는 부르짖음, 그것을 함께 듣기 시작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다. 듣는 순간, 우리는 이미 부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구원의 역사는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