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권인목사

주님의 거룩한 멈춤(눅19:1-10) / 신권인 목사

새벽지기1 2026. 4. 15. 04:21

주님의 거룩한 멈춤(눅19:1-10)

대체로 사람들은 삭개오의 프로필을 떠올릴 때,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몇 가지 부정적인 단어들로 그를 규정하곤 한다. 세리 장, 부자, 죄인. 이러한 이름들은 그가 동족들로부터 받아야 했던 비난과 배신자의 낙인을 짐작하게 한다. 그가 실제로 키가 작은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군중 속에서 존재감 없이 밀려난 '작은 자'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든 그는 결핍과 소외의 자리에 서 있었고 그 자리에서 누구보다 간절히 예수를 보고자 했던 한 고독한 영혼이었다는 사실이다.

1. 찾아오시는 은혜

본문이 시작되는 "지나시니라"(διαπορεύομαι)는 단순한 이동이나 통과가 아닌 '목적'을 지닌 만남으로 이는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고 하셨던 주님의 필연성과 궤를 같이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선재적인(Prevenient Grace) 은혜요, 거절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Irresistible Grace)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삭개오가 나무 위에 올라간 것은 그의 열망이었으나, 그 이전에 주님은 이미 그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여리고라는 구체적인 시공간 속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삭개오를 향하여 예수님은 그를 익명의 죄인이 아닌 "삭개오야!"라는 고유한 존재로 지명하여 부르셨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선한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과도 맞닿아 있다. 또한, 스바냐 3:17의 말씀처럼 우리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소외된 단독 자를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복권시키는 선언이다. 

무엇보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선언은, 놓쳐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핵심 단어가 된다. '오늘'(σήμερον)은 종말론적 구원이 현재로 침투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목자들에게: "오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2:11), 십자가 위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그리고 지금, 삭개오에게도 그 '오늘'이 도래했다. 이는 중요한 신학적 전환을 보여준다. 구원은 미래에 유보된 약속이 아니라, 예수를 만난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는 사건이다. 삭개오는 더 이상 "언젠가 회복될 자"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온 자가 되었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교만과 상처라는 나무 위에서 서성이는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초청장이다.

2. 나무 위에서의 하강('자기 증명'에서 '자기 부인'으로)

삭개오는 평생 '오르는 삶'을 살았다. 세리장이 되기 위해 사회적 위계의 정점으로 올랐고,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만큼 로마라는 권력의 나무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주님은 그에게 "내려오라"고 명령하신다. 인본주의적 '오름'의 열심은 예수를 관찰할 수는 있게 하나, 예수와 함께 거할 수는 없게 한다. 진정한 만남은 자신의 결핍을 보상받으려 쌓아 올린 '교만의 나무'에서 내려올 때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무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자신의 수치와 죄성, 그리고 그동안 의지했던 세상적 가치(돈, 지위)를 배설물로 여기는 전격적인 '자기 부인'의 과정이며 자기 증명의 마침표다. 이는 성육신(Kenosis)하신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닮아가는 첫걸음이다.


3. 회복된 관계(소유의 집착에서 공유의 기쁨으로)

삭개오의 변화는 내면의 결단에 머물지 않고 '경제적 정의'와 '관계적 화해'로 표출되었다. 이는 누가복음이 강조하는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과 '부의 올바른 사용'에 대한 완벽한 응답이다. 자신의 소유 절반을 나누고 네 배를 갚겠다는 선언은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는 그가 더 이상 물질을 자신의 안전장치로 삼지 않으며, 하나님을 유일한 신뢰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증명한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는 주님의 선언은 죄인이라는 낙인으로 인해 공동체 밖으로 밀려났던 자를 다시 '언약의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공식적인 사죄 선언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과의 운명의 결속이 맺어지는 순간이었다. 삭개오의 이와 같은 일련의 삶의 태도와 변화는 단순히 윤리적 결핍을 복구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자신의 삶의 운명을 예수의 통치 아래 두는 '왕권의 교체'였다.

존재의 전격적인 삶의 전환

삭개오의 이야기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는 누가복음의 핵심 주제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 할 수 있다. 그는 결핍을 채우려 탐욕의 길을 택했으나,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나눔과 자유의 길로 나아갔다. 이처럼 신앙이란 내 인생에 종교라는 형식과 액세서리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지하던 모든 나무에서 내려와 주님의 십자가 아래 내 존재를 굴복시키고, 그분의 통치 속에서 진정한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영적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