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권인목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 / 신권인 목사

새벽지기1 2026. 3. 26. 07:53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전에 질문하는 존재인 것 같다. 모든 인생들은 원초적인 동일한 질문 앞에서 각자의 삶의 가치와 방향을 결정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그 질문들을 하지 않게 된다. 다만 더 현실적인 질문들로 자신을 바꿔 놓는다.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어떻게 인정받을 것인가?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인생 전체를 걸고 응답해야하는 운명적인 질문 앞에 직면하게 된다. 그 질문 하나가 삶 전체를 흔들고, 방향을 바꾸며, 존재를 다시 규정한다. 그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그 하나님은 질문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질문으로 우리의 실상을 폭로하시고, 질문으로 부르시며, 질문으로 회복시키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질문은 인간 실존의 전체를 관통하는 부르심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왜곡된 기억, 상한 영혼, 잃어버린 정체성을 질문을 통해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3:9)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질문의 핵심은 이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정보의 결핍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즉 지리적 좌표가 아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귀가 아니라 존재를 향해 들려온다. 범죄 이후, 인간의 원초적인 숨바꼭질은 가장 실존적인 질문 앞에 직면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을 불편하게 만들고, 무너지게 만들고, 도망치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이 질문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최초의 질문으로서 인간 존재 전체의 자리, 정체성, 관계, 소명을 향한 추궁이다. 곧 사랑의 추적이며, 구원사의 첫 질문이자 은혜의 첫 울림이다. 이 질문은 심판의 칼날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찾으시고 부르시고 언약 앞에 다시 세우시는 회복을 위한 부르심이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4:9)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이것은 자유의 책임을 요구한다. 이는 개인적 범죄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윤리적, 책임을 소환한다. 인간의 죄는 개인의 내면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구조적 죄로 번졌음을 폭로한다. 사실 아담은 제사제도의 핵심을 붙잡은 자였다. 아벨은 어떤 특정 시대의 예배 방식이나 모델이 아니고 모든 민족과 각 세대를 관통하는 예배의 진술을 드러낸 자였다. 아벨의 제사는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의 원형이다. 하나님은 아벨이 어디 있느냐를 통해 오염된 예배와 무너진 관계를 동시에 드러내신다. 이에 대한 가인의 대답은 인류 최초의 도덕적 무책임 선언문이며, 타락한 인간 윤리의 첫 선언문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너희는 어찌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느냐? (암5:4-6, 렘2:32, 습1:6)

예언자들이 불의, 우상, 불신앙에 빠진 이스라엘을 책망할 때, 반복한 촉구로서 경배의 방향을 바로잡는 예언적 질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간을 찾아오셨다.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바로 성육신이다. 

네가 어디 있었느냐? (욥38:4)

하나님은 창조의 주권과 섭리의 신비를 드러내셔서 인간의 관점 전환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 중심적 이해에서 끌어내어 우주의 질서, 창조의 질서, 생명의 질서 앞에 세우신다. 이는 신정론을 넘어서는 신학적 지평을 연다. 하나님은 욥을 논리로 굴복시키지 않으시고 그를 경외로 무너뜨리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5)

구약에서의 아담의 존재의 자리, 가인의 형제의 자리, 이스라엘의 하나님 찾음의 자리, 욥의 피조물의 자리를 모두 통과한 후, 마침내 참된 복음의 심장부에 인간을 세워 놓는 질문이다. 이는 하나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정조준 한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신앙 고백은 교회의 본질, 사명, 권위의 기초와 근거가 된다. 교회는 이 질문 앞에서 날마다 다시 태어난다. 신앙은 정보의 동의가 아니라, 인격적 만남에 대한 응답이다. 예수님의 이 질문을 예수님에 대한 견해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너희는 나를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하느냐? 라고 묻지 않으셨다. 너희는 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라고도 묻지 않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었다. 구약의 모든 질문이 하나로 수렴되는 질문이었다.

여자여, 네게 누가 정죄하느냐?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8:10)

이 질문은 율법의 기능(정죄와 처벌)과 복음의 기능(용서와 회복)을 대비시켜 예수의 사역이 율법의 완성과 신적 자비의 우월성을 드러낸다. 예수의 질문은 그 여인을 정죄 체계 밖에서 은혜 체계 안으로 옮겨 놓으신다. 여자여! 이 한 단어는 정죄의 언어를 걷어내고 한 인간의 존엄을 회복시키시는 언어다. 이 여인은 돌에 맞아 죽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결국 돌이 아니라, 못에 박혀 죽으신다. 정죄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할 이는 여인이었지만, 그 자리에 서신 분은 예수였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17)

권위는 사랑으로 회복되며, 교회의 리더십은 사랑의 실천으로 정당화 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 속에, 왜 나를 부인했느냐? 왜 도망했느냐? 왜 약속을 깨뜨렸느냐? 에 대한 실패를 묻지 않으셨다. 베드로는 비로소 자기 확신이 아니라, 주님의 아심(은총)에 자신을 맡긴다.  

이 동전에 누구의 형상이 있느냐? (마22:20)

이 질문은 정치권력과 신적 주권의 경계를 드러낸다. 동전은 가이사의 형상을 담고 있어 세속적 권력과의 관계를 상징한다. 동전은 가이사에게 돌아가지만, 형상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께만 속한다. 인간은 자기가 속한 형상을 닮는다. 돈에 속하면 돈의 얼굴을 닮고, 권력에 속하면 권력의 얼굴을 닮고, 하나님께 속하면 점점 하나님의 얼굴을 닮아간다. 

질문하는 인간과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응답

"네가 어디 있느냐?"는 존재의 붕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책임의 붕괴,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찾지 않느냐?"는 예배의 붕괴,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는 피조성의 붕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정체성의 고백, "너를 정죄한 자가 어디 있느냐?"는 정죄의 해체, "이 동전에 누구의 형상이 있느냐?"는 존재 소속의 확정,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관계의 완성으로 복음의 절정이 드러난다. 이러한 질문들은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들로서 근본적으로 인간 존재의 실상 폭로, 타자와 공동체에 대한 책임 소환,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찾으려는 요청, 사랑, 믿음, 소명을 회복시키는 은혜의 질문임을 깊이깊이 되새기게 한다.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찾으시고, 사랑으로 추적하신다. 모든 질문은 이미 한 분 안에 감추어져 있다. 사도 바울은 선언한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다. 인간 인식 전체에 대한 전복적 선언이며, 하나님의 계시다. 모든 질문은 하나의 인격 안으로 모인다. 존재의 질문, 삶의 의미와 가치의 질문, 죽음의 질문 등이 그러하다. 신앙은 답을 가진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질문을 받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질문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 질문을 피하지 않고 날마다 그 앞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확신이 아니라 응답이다. 하나님의 질문은 심문이 아니라, 추적이며 그리고 그 추적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결국 모든 질문은 한 분 안에서 완성된다. 서로 다른 시대에 던져졌지만,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다. 인간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다시 찾으시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답을 이해함으로 구원받지 않는다. 그분 안으로 들어감으로 구원받는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질문 앞에 세우는 책이다. 우리가 피하고 있던 질문, 잊고 있던 질문 앞에 다시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