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환자 이야기
돌아오는 11월19일 주일의 설교 본문인 눅 17:11-19절에는 나병환자 이야기가 나온다.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에 의해서 치유 받았는데 한 사람만 돌아와서 예수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런 발언은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형식이다. 교회에 다닌 세월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었기 때문에 별로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나병환자처럼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는 간증 비슷한 것을 듣고 싶을지 모른다. 그렇게 읽고 위로를 받아도 크게 잘못은 아니지만 바른 성경읽기는 못 된다. 성경을 통해서 뭔가 세상에서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노하우를 찾으려고 하면 번지수를 잘못 찾는 일이다.
요즘 강독하고 있는 페터 아이혀의 『신학의 길잡이』 37쪽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 하나님은 위기를 피하도록 인간의 역사를 이끄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인간적 표상들을 파괴하는 이러한 정열적 관계의 위기 속으로 그가 선택한 백성을 그의 배타적 요구를 통해서 밀어 넣는다.” 하나님에 대한 아이혀의 설명은 한국교회 신자들의 일반적 하나님 이해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한국교회 신자들은 성서가 정말 말하려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에만 관심이 많다.
나병환자 이야기에서 핵심은 나병이 기적으로 치료되었다는 데에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다른 방식으로 일어난다. 의사가 고치든지 아니면 우연하게 자연 치유를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나병을 안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나병이 없는 사람보다 더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아 나서면 된다.
성경에 분명히 나병환자들 열 명이 고침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초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확인될 수 있다고 말이다. 이것도 오해다. 고대인들은 이런 치병, 축귀 현상을 일상적으로 경험했다. 예수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능력이 있는 사람들 이야기에는 이런 일들이 흔히 따라다닌다. 당시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점성술을 합리적인 것으로 여기던 시대의 언어를 아무런 해석학적 과정 없이 무조건 사실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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