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설교공부에 대해(1)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7. 13. 07:00

    9월12일 자로 알림판 메뉴에 올린 ‘설교공부모임’ 꼭지 글을 그대도 읽었을 것이오. 혹시 궁금한 게 있소? 사실 설교를 주제로 하는 모임은 목회자들 세계에서 흔한 거요. 이미 신학교에 다닐 때부터 설교학을 공부하고, 목회 현장에서도 설교 세미나를 접할 기회는 많소. 그런 모임에 쫓아다니기가 귀찮을 정도로 널리고 널린 게 설교공부 모임이오. 이런 마당에 내가 또 다른 모임을 준비하는 이유가 뭐요? 이전의 모임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이번 모임이 전혀 새로워야만 말이 되는데, 이 두 가지가 그렇게 분명하지 않소. 이전의 모임이 어떤 성격인지는 대충 감을 잡고 있지만 실제로 그런 모임에 참가해보지 않아서 내가 말할 입장이 안 되고, 이번 모임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새롭게 비칠지도 아직은 시작하지 않았으니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소. 이런 애매한 입장을 정리한다는 뜻으로 그대에게 한 마디 할 테니 들어보시오.

 

     설교는 기본적으로 배울 수 없소.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설교 자체를 배우는 것은 아니요. 신학교에 개설된 설교과목은 설교 자체가 아니라 설교 전달 방법론이오. 그것은 배울 수 있고, 또 배워야 하오. 그러나 설교 자체는 배울 수 없고, 배울 필요도 없소. 설교 전달 방법론과 설교 자체는 다른 거요. 성악으로 비교해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소. 발성 연습은 배워야 하지만, 노래를 소화해서 부르는 것은 배울 수 없소. 자기가 경험한 음악의 깊이만큼 노래를 부를 수 있을 뿐이오. 설교자는 성서텍스트라는 악보를 통해서 영적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오. 텍스트의 놀라운 세계를 알지 못하면 아무리 전달 테크닉이 있어도 설교를 할 수 없소. 많은 대중 설교자들은 설교자라기보다는 기술에 매달리는 설교꾼이라고 보면 좋소. 이미 드러난 기독교 진리를 입담으로 전달하고 있을 뿐이오. 그런 것도 좋은 설교 아니냐, 하고 생각하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소. 그것은 마치 컴퓨터 피아노를 듣는 것과 비슷하오. 기술적으로 아무리 완벽해도 그것은 죽은 연주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그대는 잘 알고 있을 거요.

 

     이번 설교모임에서 나는 설교를 가르칠 생각이 전혀 없소. 그럴 능력도, 자격도 없소. 설교 영성에 초점을 둘 것이오. 설교 신학이라 해도 좋소. 성서텍스트와 영적인 대화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생각이오. 이것은 마치 모차르트 피아노곡을 해설하는 음악해설가의 그것과 같소.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음악이 무엇인지, 모차르트의 음악세계가 무엇인지, 악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설명해야 하오. 나도 그런 작업을 해야 하오. 신학이 무엇인지, 신앙과 영성이 무엇인지, 설교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설명할 생각이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설교 영성이 무엇인지를 청중들이 깨달아갔으면 좋겠소. 이건 다시 말하지만 가르치거나 배우는 차원과는 다른 거요. 형식적으로는 가르치고 배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소. 나는 청중들을 가르치려는 게 아니오. 신학, 신앙, 성서, 성령에 대한 나의 경험을 말하는 거요. 그것이 옳으면 청중들에게 공명이 될 것이고, 틀리거나 미숙하면 허공을 치는 주먹질이 될 거요. (2010년 10월2일, 토, 햇빛, 구름,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