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다시 4대 강 정비사업에 대해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5. 17. 04:21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이오. 그대도 고난주간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을 거라고 믿소. 오늘처럼 생산과 소비, 풍요 지상주의, 경쟁 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고난의 의미는 설득력을 얻기 힘들 거요. 지난 며칠간은 서해안에서 침몰한 한국 해군 군함 천안함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있소이다. 원하지 않은 고난의 시간을 보내게 된 것 같소. 오늘은 나는 어느 인터넷 매체에 보낼 원고를 썼소. 아직은 초안이래서 완성도가 떨어지오. 그래도 그대에게 먼저 보이고 싶소. 너무 심각하지 않게 읽어주시구려. 그대여,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저물었소. 이런 밤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맞이할 수 있을 거 같소. 내일 새벽부터 봄비가 내린다는 소식이오. 평안한 밤이 되기를 바라오.(2010년 3월30일, 화요일, 죽음과 같은 절망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위해 기도드리며....)

 

지금 정부는 많은 환경단체와 야권, 그리고 종교계까지 반대하고 있는 4대 강 정비 사업을 강행하고 있다. 여기서 종교계는 로마가톨릭교회와 불교와 개신교를 총 망라한다. 여기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종교는 로마가톨릭이다. 주교단이 공식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반해 개신교회는 일치된 의견을 모으지는 못한 상태이다. 한국개신교회를 대표하는 KNCC와 한기총이 제 각각 다른 입장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 국민의 70% 정도가 이 사업을 반대하거나 속도 조절을 요구한다. 심지어 조선일보도 현재의 사업 추진 방식을 비판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임기 내에 사업을 끝내겠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 왜 그렇게 고집을 피우는지 그게 이해가 안 된다.

 

이명박 대통령을 중심으로 해서 4대 강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이들의 진정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이 사업이 강을 살리는 일이라고 확신한다. 멀지 않은 미래에 현실로 다가올 물 부족을 미리 준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종의 예언자적 사명감의 발로이다. 선교에 대한 사명감으로 불타는 사람은 생명을 담보하면서 오지에 뛰어 들듯이 지금 이명박 대통령은 그 어떤 비판과 반대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이 사업을 거둬들이지 않을 것이다. 중간에 그걸 그만 둔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아무도 그를 말리지 못한다.

 

우리가 지난 인류 역사와 교회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나름의 종교적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진 일들이 몰고 오는 폐해는 그 어떤 것들보다 심각하다. 중세기에 저질러진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사냥의 집행자들은 종교적 확신으로 가슴이 뜨거웠던 이들이다. 독일의 신성로마 제국 건설을 꿈꾸었던 히틀러도 나름으로 민족적인 사명에, 이는 종교적 사명감과 비슷한 현상인데, 사로잡혔던 인물이다. 지금 필자는 한 나라의 지도자이며 한 교회의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의 정신 분석을 시도하는 게 아니다. 사업에 대한 그의 진정성이 종교적 소명과 결합된 탓에 교정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4대 강 사업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도 이미 시기가 지난 것 같다. 이런 방식으로 사업 추진 세력을 설득시킬 수는 없다. 최선의 선택은 반대 여론을 지금보다 더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각 교단들이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천명하는 게 필요하다. 앞에서 거론했듯이 주교단 회의를 통해서 반대 입장을 분명하게 보인 로마가톨릭교회의 태도가 바람직하다. 개신교회에서는 일치된 의견을 보이기가 어렵다. 오히려 정부 입장을 비호하는 개신교회 지도자들이 더 많을지 모르겠다. 개신교회가 대사회 문제에서 로마가톨릭교회보다 늘 점수를 못 얻는 이유가 이런 데에 기인한다. 노회, 지방회, 총회, 한기총과 같은 공식적 기구를 통해서 의견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의식이 있는 신자들의 입소문을 통해서라도 그런 노력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 신자들에게 약간이나마 도움을 주려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어떤 신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4대 강 정비사업이 왜 나쁘냐고 말이다. 홍수도 막고, 물 부족도 대비하고, 경제 성장에도 도움을 주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이런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닌 필자가 말할 입장이 아니다. 그리고 웬만한 것은 전문가들이 다 밝혔다. 현재 이 사업이 결국은 운하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사실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습지가 어떻게 훼손되는지에 대한 계산도 윤곽이 잡혀 있다. 홍수 방지도 사실은 강이 아니라 지천을 정비하는 게 옳다. 노파심으로 한 마디 하자면, 4대 강 사업을 반대한다고 해서 이 나라의 산과 강이 어떻게 되는지 신성불가침으로 놓고 무조건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산에 나무를 심어야 하기도 하고, 또는 길을 내야 할 경우도 있다. 농사를 위한 저수지를 만들고, 수력발전을 위한 댐을 만들 수도 있다. 옛날부터 치산치수는 지도자들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문제는 지금 추진되고 있는 4대 강 정비 사업의 기본 정신이다. 즉 이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다.

 

기독교인의 세계관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을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도구화할 수 없다. 오히려 거꾸로다. 사람은 세상에 의존적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또한 세상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창조능력이 내재해 있다는 뜻이다.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세상은, 즉 자연은 바로 하나님의 몸이다.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믿듯이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을 거룩한 하나님의 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오해는 마시라. 자연을 숭배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범신론을 주창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사람의 기술과 문명보다 우월하다는 말이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세계 창조자로 믿는다면 강까지 재화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경제 만능주의자들과, ‘묻지마’ 식의 개발주의자들과 투쟁해야 한다. 이런 개발주의자들이야말로 구약성서가 말하는 바알숭배자들이 아니겠는가. 유대인들의 역사에 바알숭배가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경제 만능주의와 개발주의는 사람들의 마음에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교회 성장 이데올로기에 빠져버린 한국교회에 이런 투쟁을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 형국일지 모르겠다. 그래도 희망을 잃을 필요는 없다. 아무리 어려운 시절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준비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