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낯선 길을 가게 될 때, 하는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어디까지 가야 할까?”와 “어디까지 가게 될까?” 입니다. 언뜻 같은 질문 같아 보이지만 사실 전혀 다른 질문입니다. “어디까지 가야 할까?”는 의무에 관한 물음이고, “어디까지 가게 될까?”는 기대에 관한 물음입니다.
함께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상대가 주는 이익 때문에 함께 있다면 “어디까지 가야 할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반면 관계를 통하여 서로 성장하고 변화하며, 힘을 합쳐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고 또 새로운 목표를 향해 간다면 서로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가게 될까?”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천천히 걷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에게서 배우며 따라가며 닮아가게 됩니다. “어디까지 가게 될까?”라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그 험난한 여정을 걸으며 이스라엘 왕이 됩니다. 왕이 되어서도 연전연승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백성들에게 베푸는 밝고 따뜻한 왕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걸음은 멈추지 않고, 아직도 더 가야할 길을 나섭니다. “어디까지 가게 될까?”
어느 날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 요나단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아려옵니다. 그에게 아들이 있다니, 다윗은 그를 왕궁으로 불러올립니다. 그의 행색은 왕손이라 할 수 없이 초라했고, 게다가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가 있었습니다.
므비보셋이 다섯 살 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할아버지 사울 왕과 아버지 요나단이 죽었고, 왕궁은 공포에 휩싸여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그때 그를 안고 도망하던 유모가 넘어져, 그는 두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므비보셋은 자라면서 다윗에 대한 많은 말을 들었습니다. 다윗이 언젠가는 사울 왕의 후손을 찾아내 반드시 그 원수를 갚으러 올 것이라는 둥, 다윗이 아니었으면 왕이 되었을 거라는 둥, 다윗의 대한 반감과 두려움은 점점 더해져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이 되어 자신을 찾는다고 하니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를 ‘죽은 개’ 취급하며 목숨을 부지하려는 므비보셋에게 다윗은 은총을 베풉니다. 사울의 모든 밭을 그에게 주고, 왕자로서 다윗성에 살게 한 것입니다. 원망과 두려움의 고리를 다윗은 진정한 사랑과 큰 자비로 덮어 버립니다. 다윗이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진 것입니다.
다윗은 어디까지 가게 될까요? 또한 다윗의 사랑을 받은 므비보셋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므비보셋의 이름은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다시 등장합니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다윗은 왕위를 빼앗기고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예루살렘을 탈출할 때 므비보셋의 재산 관리인 시바가 합류합니다. 다윗이 시바에게 묻습니다.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시바가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삼하 16:3) 므비보셋이 혼란을 틈타 왕위를 노리고 예루살렘에 남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바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여러 날 후에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로 끝나고, 다윗이 예루살렘에 왕위를 복귀하러 와서 보니 므비보셋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내 주 왕이여,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나를 내 주께 모함하였나이다.”(삼하 19:26)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요? 다윗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였을까요?
헤아려 보면 다윗은 그간 수많은 일들을 당하였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 배신의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 살기 위한 책임전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거짓과 위선들, 이런 일들 중 하나만 당해도 분노로 평생을 곱씹으며 주저 앉아버릴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압살롬 반역에 도망하던 다윗을 사울의 시종 ‘시므이’가 저주 합니다. 시므이를 죽이려고 다윗의 장군 아비새가 칼을 뺍니다. 다윗은 이를 막으며 말합니다.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내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삼하 16:11-12)
다윗은 참혹한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처사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을 야속해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뒤라도 따랐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갔고, 그의 그릇은 크고 넓어 졌습니다. 실수도 있었고,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범죄도 저질렀으나 하나님과 동행한 다윗은 마침내 하나님의 포이에마, 하나님의 걸작품이 되었습니다.
내 느낌대로 내 생각대로 살아왔으면서도,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하냐?”고 대들 듯 하나님께 따졌던 우리들임에도 여기까지 왔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는 징징대고 투덜대고 한숨 짖고 낙담하는 일을 멈추기로 합시다. 모든 고난과 어려움과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처사로 받아들이며, 거기에 담아놓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찾아내고, “어디까지 가게 될까?”하는 기대와 소망 가운데 전진하기로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열심이 모든 일을 합력하여 우리를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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