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가인의 표지, 예수의 흔적

새벽지기1 2016. 8. 24. 07:38


미국에 캐딜룩(Cadillook)이란 차가 있습니다. 겉모습은 미국 최고의 차 캐딜락이지만 엔진은 중고 싸구려 재생 엔진을 달고 다니는 차입니다. 캐딜락처럼 보인다고 해서 ‘캐딜룩’이라고 부릅니다. 캐딜룩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인생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끝내는 가짜로 끝납니다. 가짜를 더욱 가짜로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뇌물로 바친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셨고. 그런데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거부된 이유를 동생 아벨에게 떠넘기고 아벨의 목숨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그 결과 땅은 황폐하여지고 사람들은 가인을 피하게 되고 가인은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유리(遊離)하는 자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인의 반응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 4:13)


동생을 죽인 엄청난 죄에 대한 대가가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데, 가인은 그 벌이 너무 중하다고 하나님께 항변하고 있습니다. 동생을 죽이고도 아무런 벌도 받지 않겠다는 것일까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덧붙이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 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동생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므로 자신이 가인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삶의 목표나 방향도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갑니다. 때로는 하찮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느라고 허둥댑니다. 그런 삶이 바로 ‘유리하는 삶’입니다. 정말 심각한 것은 그렇게 살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가인보다 못한 사람들입니다.


가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는 것과 유리하는 자가 되어 죽임을 당할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과연 나는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가? 과연 우리들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는가. 다만 죽는 것만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지 않는가?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가인의 표식’입니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창4:15)


그럼 가인의 표식은 과연 무엇일까요? 성경은 가인의 후예들의 삶을 이어서 서술합니다. “아내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창 4:18) 그 내용은 가인의 자손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에 정착하고 결혼을 하여서 자녀를 낳고 살았습니다. 창세기 4장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는 여전히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했으며 그 죄는 가인에 의해서 더욱 깊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하는 구절은 4:2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창 4:23-24)” 가인의 자손 라멕이 아내에게 하는 말입니다. 라멕이,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나, 상처를 입었습니다. 여기서 ‘창상’이란 몸의 상처나 마음의 상처를 말합니다. 말로 인한 상처처럼 아주 소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그 일로 라멕은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칠 배일진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벌이 칠십 칠 배니라.”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증오의 증폭’을 말합니다. 나에게 일만 원의 손해를 입혔느냐? 가인은 칠 만원의 복수를 하지만, 나 라멕은 칠십칠 만원 어치의 복수를 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어떤 사람들은 사랑과 은혜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증오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얼마나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차 있으며 또 미움과 증오에 익숙해져 있는가 그 실체를 알면 놀랄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 보십시오. 은혜를 오래 기억하십니까? 아니면 상처를 오래 기억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은혜는 쉽게 망각해 버립니다. 그런데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두고두고 원수가 됩니다.


‘증오의 증폭’이 바로 가인의 표식입니다. 죄의 본질인 은폐와 책임전가는 인생을 가짜로 살게 만드는데 여기에 가인의 표식인 증오의 증식이 더해져 그 인생을 완전한 가짜로 고착시킵니다. 가인의 표식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않고 피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표식을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조직폭력배들이나 불량배들이 스스로 새기는 문신이나, 남을 위협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복장이나 장비, 얼굴 표정 등등 모두 가인의 표식의 범주에 넣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19은 ‘육체의 일’에 대하여 열거하고 있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그런데 이렇게 시작합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육체의 일은 감추려고 해도 쉽게 눈에 띄며, 쉽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인은 증오와 미움의 표를 달고 하나님 앞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에덴 동편 놋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에덴의 동편 놋 땅은 어디일까요?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에덴’은 ‘생명, 기쁨, 행복’이라고 하는 영적 개념입니다. 마찬가지로 에덴의 동쪽 ‘놋’ 땅 역시 장소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이 놋은 ‘방황과 유리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을 떠나면 누구나 방황하며 유리하면서 살게 됩니다. 돈을 쫓으며 권력과 쾌락을 쫓으며 귀중한 생명과 시간을 낭비하며 방황합니다. 그러다가 생기는 증오와 미움으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그 복수심만 증폭시키면서 살다가 삶이 끝납니다. 바로 이것이 놋 땅에서의 삶입니다.


가인의 표시을 사랑의 흔적으로 바꾼 사람이 있습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사울이었습니다. 그 또한 가인의 표식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를 향한 증오심으로 가득했던 인물로, 기독교를 파괴하고 기독교인들을 말살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살기등등하여 기독교도들을 잡으러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생명의 주님을 만납니다. 그 만남으로 인하여 바울에게 있던 가인의 표식이 말끔히 지워졌습니다. 그 사도 바울은 훗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몸에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예수님은 증오를 종식시키고 증오를 사랑으로 바꿔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가인의 표식을 지워주시기 위하여서 십자가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내어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예수의 사랑의 피만이 가인의 표식을 지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증오로 인한 가짜 삶을 진짜 삶으로 바꿔주시기 위해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흔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특권과 세상을 향한 소망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적개심과 세상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도 그 안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고 말합니다.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는 것”(갈 6:15)이라 하였습니다. 그 이후의 삶은 오직 사람들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일에 매진합니다. 그러자 그에게서 예수님의 흔적은 더욱 또렷이 드러났습니다.

내 몸에 지닌 것은, ‘가인의 표식’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입니까? 사람은 무엇일까요? 사랑을 사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 사랑, 삶은 동의어입니다. 사랑이란 생명을 살리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케 만드는 행위입니다. 그 사랑을 살라고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 삶을 살 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은혜가 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