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인간은 얼마나 오래 살까?

새벽지기1 2016. 8. 31. 07:38


생명이 있는 것은 언제나 유연하며. 성장하고 자라납니다. 상황에 맞게 변형되어서 잘 적응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본질이나 생명력은 언제나 유지되며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을 잃게 되면 그 체제라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제도와 규정을 강화하고 구성원들이 흩어지지 못하도록 억압하고 또한 그 틀을 강화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게 됩니다. 율법을 엄격하게 적용했던 유대교와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집단적이고 공동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개인에게도 적용됩니다. 내 안에 참 생명은 간 데 없고, 그저 육체만을 유지하는 시스템만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지라.”(창 6:2)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람들과 사람의 딸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영적인 존재’들을 말하며, ‘사람의 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육적인 존재’들을 말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 두 계보가 서로 혼합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혼합이 될 때에, 생물학적으로는 우성인자가 두드러지게 마련인데, 신앙적으로는 그 반대입니다. ‘육적 인자(因子)’가 “영적 인자”를 누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더니.”(엡 2:3) 말씀인데, 아무리 목사요, 장로라고 할지라도, 아담의 타락 이후 사람들은 본질상 불순종의 자녀이며 진노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도 작고 사소한 어려움에 봉착해도 소릴 높였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리들의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언제나 넘어질까 주의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아내를 삼은지라.” 영적 존재가 육적 존재와 한 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결합의 이유입니다.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그저 겉으로 드러난 미모를 의미합니다. ‘보았다.’는 단어도 그저 힐끗 본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아라’로서 ‘자세히 주목하였다’는 것입니다. 탐닉했다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가 육적 존재의 겉으로 드러난 미모를 탐닉하여 한 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창 6:3) 사람은 흙으로 지어진 육적 생명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적 생명이 결합된 존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사람들의 원래 이름은 ‘생령’, 살아있는 영입니다. 그런데 그만 영을 상실해 버리고 그 이름이 ‘육체’로 바뀌었습니다. 단순한 고기 덩어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성령께서 거하실 곳을 사람 안에서 찾으실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곳은 우리 영(spirit)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창 6:3) 마땅히 죽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피와 살만이 남은 육체의 생명을 120년 동안은 보존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배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로 살아남은 육체의 생명을 무엇을 위해서 사용해야 할까요? 단 하나입니다. 잃었던 영적 생명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육적 생명을 보존해 주신 이유입니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창 6:4) 네피림은 거인을 말합니다.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대표적인 예가 히틀러나 칼 마르크스와 문선명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들의 뿌리는 유대교와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들은 어쩌지 못했던 막강한 네피림들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왜곡된 영적 존재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네피림은 천박한 상업자본주의입니다. 막스 베버가 지적하였듯이 자본주의의 뿌리는 기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사람들에게 부여된 개성과 재능과 가능성을 자유롭게 발휘하여 이룩된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그런데 오직 물질과 부의 창출에만 집중하며, 특히 대중매체를 장악하여 소비만을 조장함으로, 그 결과 자연 파괴와 인간의 고귀한 정신과 영혼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이제는 인간의 통제 불능 상태로 그 끝을 짐작조차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자본을 투입하여 식량과 자원을 독점함으로, 하루아침에 가난한 사람들을 더 큰 빈곤으로 몰아넣는 일은 작은 예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현대판 네피림으로 그 짙은 그림자가 서서히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요?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 성령으로 하여금 내 안에 거하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내 것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가시면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그러자 제자들이 들은 대로 대답합니다.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아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 아마도 거기에는 “목수라고 합니다.” 또 “사람을 고치는 의사라고 합니다.” 라는 대답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시고 또 다시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 대답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너무 기뻐하며 말씀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이 베드로의 대답의 출처는 ‘육체를 통해서’, 즉 경험이나 교육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생각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집니다. 경험을 통하여 예수님을 목수라 생각하면 망가진 의자를 들고 갈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병이 나았다면 아플 때마다 예수님을 찾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사람들의 행동과 삶을 올바로 바꿔놓습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교회를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 위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특정 개인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신조 아래, 교회는 누구보다도 막강한 네피림으로 등장하여 전횡을 휘둘렀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신앙고백 공동체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를 향한 신앙고백의 올바름과 그 단단한 정도에 의해서 음부의 권세, 즉 사탄의 영향력이 결정됩니다. 느슨하게 “대충 그렇겠구나.” 하고 믿으면 아담과 이브가 그랬던 것처럼, 사정없이 음부의 권세가 공격을 합니다.


그러나 확실히 굳게 믿으면 절대로 사탄의 권세가 우리를 흔들지 못합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자 교회입니다. 확실한 믿음과 굳건하고 올바른 신앙고백 위에 우리 자신을 세우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축복은 이어집니다.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런데 이 특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믿으니 내가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신다는 의미가 절대로 아닙니다. 이 문답의 본질을 아셔야 합니다.

천국의 열쇠는 열심히 치성을 드리며 자기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령의 가르침으로 주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된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겉모습은 하나님의 아들, 그러나 원하는 것은 사람의 딸들과 같다면, 우리는 고대로부터 악명이 높았던 네피림이나 용사들로 전락할 것입니다. 성도는 생명이신 예수님을 담는 그릇이며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는 돋보기며 세상이 썩지 않도록 막아주는 방부제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짓밟힐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에 의해 밟히고 있지나 않은지 겸허히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볼 때입니다. 다시 교회의 생명력을 회복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세련된 조직도 엄격한 계율도 막강한 체제도 없었지만 사람과 세상을 살리셨습니다. 단단하게 굳어서 사람을 질식시키는 하나님 종교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 생명을 소유하여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바로 아는 일입니다. 그 분을 따라 사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당부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