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왜 동생을 지켜야 돼요? 나 살기도 바쁜데!

새벽지기1 2016. 8. 13. 07:39


“안중(眼中)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눈에 뵈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무엇인가에 몰입하여 마음을 빼앗겼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소유에 골몰할 때, 다른 사람들이 안중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할 때, 모든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도 보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의 고된 삶이 시작됩니다. 그들은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유명한 “가인”입니다. 아담은 가인을 낳고 기뻐서 소리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도다.” 살면서 가장 큰 기쁨 중의 하나는 새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아들을 주셨는데 ‘아벨’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섬겼고 각각의 소산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된 영문인지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가인은 화가 나서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을까요? 이미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6-7)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이미 가인의 속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가인은 선을 행치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절하신 것입니다.


왜 가인은 그런 태도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까요? 아담과 이브가 아들을 얻었을 때 그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카나’에서 파생된 것으로, 그 뜻은 ‘소유와 획득’입니다. 아담에게는 여전히 이름 짓는 권한이 있으며, 그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며 본질을 드러내며 그 운명을 결정합니다. 아담은 아들이 소유와 획득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이루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에 이미 또 다른 비극과 불행의 씨앗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삶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소유의 삶’‘관계의 삶’입니다. 타락 이전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바로 ‘관계를 통한 삶’이었습니다.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 그리고 이브와의 합일된 삶이었습니다. 아담은 이브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보다 그가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곧 사랑이며, 이 사랑의 관계에서 에덴동산이 지켜지며 그 행복과 기쁨이 향유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아름다운 관계의 삶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소유’하기를 원했고 하나님과 같은 지위를 ‘획득’하고자 시도함으로써 무너져 버렸습니다. 타락이란 소유와 획득을 통하여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제일 가슴 아픈 왜곡된 이야기는, 말라기서를 통해서 십일조를 강조하며 하나님을 시험하여 보라는 말입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죄 중의 가장 큰 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애타는 절규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악함이 갈 때까지 간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보내시고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선지자를 보내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늘 문을 닫아 버리셨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기 없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며 물질의 십의 일을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충성하며 사랑하겠다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제물에는 사랑과 충성을 고백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제물을 받으실 리가 없습니다. “죄를 다스리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서” 드나들 때마다 죄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가인은 자신의 죄를 다스리지 아니하고. 그 책임을 동생 아벨에게 전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책임전가는 죄의 전형적이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과 아내에게, 어머니는 뱀에게 돌리더니, 그 아들은 동생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유와 그에 따르는 집착에서 오는 무서운 점입니다. 오직 그 생각뿐, 사고는 경직되고 다른 것은 안중에 없습니다. 가장 먼저 안중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재물이나 물질이 필요치 않은 ‘자존 하시는 분’임을 보지 못합니다. 나아가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전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들에서 아벨과 단 둘이 있을 때 동생을 돌로 쳐 죽이는 일을 벌이고 맙니다. 죄는 죄를 잉태하고 더 큰 죄를 낳게 마련입니다. 소유에 눈이 멀 때, 그 눈은 더 큰 불행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가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파괴된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을 보십시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관계를 묻고 계십니다. 가인은 대답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그렇습니다. 형 가인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우와 좋은 관계를 맺기 원하며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소유와 획득을 삶의 목표로 살아가는 가인은, 자신이 아우를 지키는 자라는 사실을 알 리가 없습니다. 동생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습니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손으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1-12) 다시 상기하십시오. 이것은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죄지은 사람이 반드시 처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아버지의 죄로 말미암아 땅은 가시덩굴과 엉겅퀴로 가득 덮이게 되었고, 아들로 인하여 남아있는 효력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둘러보십시오. 모든 것이 경제 논리로만 움직입니다. 더 늦기 전에 천박한 자본주의 망령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각을 가진 전문가들, 교리에 얽매이지 않은 참 진리와 자유의 그리스도인들을 교회가 키워내야 할 때입니다. 전혀 다른 차원 전혀 다른 가치의 삶을 살 때가 되었습니다. 소유가 아니라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그 관계를 통하여 자아를 고귀하게 실현해 가는 삶,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과 사회에 덕을 끼치며 존귀한 영적 지도자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유리하는 사람들을 인도하여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세상과 나아가서는 자연까지도 모든 피조물들이 탄식하면서 그와 같은 영적지도자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번영을 약속하여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불렀고 일신의 안녕과 평안을 갈구하며 주 앞으로 나갔던 시대, 치유와 부귀영화를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로 택했던 시대에 이제는 종언(終焉)을 고해야 합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기독교는, 하나님을 잘 섬겨 복을 듬뿍 받겠다는, ‘소유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바르고 따뜻한 관계로 무너진 세상을 바로 세우는, ‘관계의 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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