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진짜배기 믿음

새벽지기1 2016. 8. 29. 07:41


아기는 엄마의 이름도 나이도 학벌도 또한 배경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렇게 생긴 저 여자가 나를 가장 사랑하며 좋아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체험적으로 안 지식입니다. 그래서 그 엄마가 없으면 불안해하고 슬퍼합니다. 이렇게 함께 느끼는 것을 ‘총체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합니다. 함께 좋아하고 함께 슬퍼하며 함께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아기는 엄마를 야다하고 엄마는 아기를 야다한다”라고 말합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창 4:25) ‘동침하다.’는 것도 ‘야다’라는 동사를 씁니다. 이 ‘야다’라는 동사는 매우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알다’, ‘믿다’, ‘사랑하다’, ‘속속들이 알다’ 나아가서 ‘헌신하다’, ‘다 내어주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라고 할 때에도 ‘야다’라는 동사를 씁니다. 그러므로 그 구체적인 뜻은 “하나님은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며 우리가 비록 부족하지만 믿으시며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변적이며 관념적인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진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야다’하여야 합니다. 이 ‘야다’ 동사는 참 신앙이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가, 그 방향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가장 소중한 동사입니다.


아벨은 죽고 가인은 놋 땅으로 떠나버렸습니다. 미어지는 가슴을 쓸어안고 우는 아담과 이브에게 하나님께서 귀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파한 만큼 성장합니다. 세 번 째 아들을 진정으로 “야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맞게 잘 키웠습니다. ‘셋’의 뜻은 ‘대신하다’입니다. 떠나버린 장자 가인을 대신하며, 동시에 하나님 올바로 섬긴 아벨을 대신한 존재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6)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 곧 예배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어떤 대가를 치러도 상관없습니다. 예배는 ‘영원한 복음’(계·14:6)이며, 육신을 벗고 하늘나라에서도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사람의 의무이자 특권이며,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구원의 증거’(출 3:12)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족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수많은 족보들을 두 부류로 정확하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계보와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대적자들의 계보입니다. 창세기 4:17-22까지는 ‘가인의 계보’이고, 창세기 4:25 - 5:32까지는 셋의 계보입니다. 그런데 이 두 계보를 열심히 자세히 들여다보면 확연하게 드러나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성을 쌓고 자기 이름을 높이 붙입니다. 또한 육축을 치는 자,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와 같이, 직업으로 그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며 많은 문명의 소산들의 창시자가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 유리하는 자로서 증오를 증폭시키며 사는 삶을 영위합니다.


반면 셋의 이름의 또 다른 의미는 ‘안정(安定)’입니다. 그는 유리하는 대신, 안정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더욱이 셋은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명명하였는데, 그 뜻은 ‘죽음으로 사라질 존재’입니다. 셋은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의 허무성과 허구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 지었으며 그 아들도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성실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하나님 사람들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이후의 사람들의 태어남과 이 땅에서 살다간 햇수와 죽음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숫자에 엄청난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숫자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십니다.


히브리 명상법 중에 ‘촉루명상’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촉루’란 사람의 해골을 말하는데, 그것을 앞에 놓고 고요히 명상하는 그런 명상법입니다. 삶을 열 단계로 구분하고 탄생에서 죽음까지 그리고 죽음 이후까지 꿰뚫어 보게 하는 명상법입니다. 마지막 십 단계 명상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 “땅 속에 묻힌 지 300년 내 모든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를 기억해 주는 모든 사람들과 내가 남긴 모든 업적들이 사라진 뒤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고 산새들이 지저귈 내 무덤자리를 묵상하십시오. 어쩌면 내가 묻힌 곳에 새로운 도시가 서고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촉루명상이 단지 인생의 허무함으로 끝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먼지만도 못한 우리 인생 그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이 촉루명상의 목적입니다.


창세기 5장 기록을 읽노라면, 저는 촉루명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살다간 연수에서 관심을 돌려, 촉루명상을 하듯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하나님의 깊고 신비한 경륜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기 까지 2000년의 세월이 창세기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이 계보는 하나님 사람의 계보라는 점입니다. 2000 년의 세월동안 수많은 사건과 위험과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셨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야다”하셨습니다. 야다란 “사랑하다 신뢰하다”는 뜻과 함께 “낱낱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연수가 정확히 기록되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들입니다.


두 번째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구원역사의 산 증인들이며 하나님의 은총을 담아내는 그릇이었습니다. 이 이름들이 남겨진 이유는 단 하나, 그 장구한 세월동안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을 설명하는 공통된 구절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 길고 긴 세월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의지하며 경배하며 견뎌냈습니다. 그 업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견디며 참으며 그렇게 드리는 인내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세 번째, 이 계보는 혈통적인 계보가 아니라 ‘신앙의 계보’라는 점입니다. 이 사람들은 혈통적으로는 장남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계보는 장남들에 의해서 이어져 내려오지만, 신앙의 계보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분들은 신앙의 맏아들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일은 믿음의 맏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맏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이 분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마침내 영화롭게 하신 분들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믿음으로 인내로 견디고 받고 누린 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 하셨습니다. 가족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개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혈육이 아닌, 신앙에 의한 가족 공동체입니다. 이 분들은 우리와는 혈통적으로는 아무 관계가 없고 또한 시대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하나님 가족들의 까마득한 선조입니다. 더욱이 에녹은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에녹은 창세기 5장에 기록된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고통을 맛보지 않는 복을 누렸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이렇게 남긴 이유는 우리 또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해서입니다. 수많은 업적을 남기는 것보다 묵묵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더 귀합니다. 또한 노아타락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 훌륭한 믿음의 선조입니다. 노아란 ‘하나님의 위로’라는 귀한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노아를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가 광야와 같은 이 땅에 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하나님을 ‘야다’하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셔서 모두 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리하여 이 거룩한 계보 맨 끝에 저와 여러분들의 이름이 기록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