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특명! 생명나무를 찾아라

새벽지기1 2016. 8. 9. 07:43


고통은 죄에 대한 벌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갈 때, 고통과 저주는 자연스럽게 풀린다는 것입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7-18)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이 말씀은 “땅은 나로 인하여 축복을 받고 나는 돈 벌려고 몸부림치지 않아도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땅은 내게 포도나무와 무화과를 낼 것이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급속한 산업화와 이념도 너도 나도 없는 상업자본주의의 결과, 넘쳐나는 제품들과 버려지는 생산품들은 자원을 고갈시키고 자연 환경을 황폐케 하였음은 누구나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경제는 유통이라.’ 그 회전이 멈추는 순간 나라와 세계가 파멸한다며 달리기를 멈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호랑이 등에 온 인류가 올라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는 더 많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덮여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겪게 될 운명을 알려 주십니다.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타락한 인간들은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말합니다. 자 이제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며, 둘째는 죽음 이후 어떤 일이 생기는 지 전혀 모르며, 셋째는 죽음은 누구도 동행하지 못하고 홀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목회자로서 그 동안 수많은 죽음을 보았습니다. 죽음들을 보면 볼수록, 죽음은 신비이며, 죄와 고통 가운데 사는 우리들에게 둘도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절감합니다. 속사람이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무병장수는 복이 아니라 오히려 화(禍)입니다. 타락한 아담과 이브에게 죽음은 오히려 축복입니다. ‘죄 가운데 영생’은 가장 큰 저주임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시고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막으신 것입니다. 성경은 육체를 ‘장막(帳幕)’이라고 합니다. 장막은 텐트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중 아나니”(고후 5:1)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로 육체를 입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여행을 온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을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이 땅에서의 여행이 끝나면 모두 다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우리 아버지께서 기다리시는 하늘의 본향입니다.

비록 인간이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더욱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 사랑의 증거들이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창세기 3:20)

첫째, 여자의 이름을 ‘하와’ 곧 ‘생명의 어미’라고 지었습니다. 즉시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보존해 주셨습니다. 장차 뱀의 후손과 하와의 후손, 다시 말해서 생명의 후손과 사망의 후손이 한판 승부를 겨루게 될 것인데 사망의 후손은 생명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나 생명의 후손은 사망의 후손의 머리를 결정적으로 상하게 할 것입니다. 훗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 곧 생명의 후손으로 오셔서 사탄을 물리치시고 최후의 승리를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세기 3:21)

둘째, 하나님께서는 무화과 잎을 가린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죽옷을 입혀 가려 주셨습니다. 반나절이면 말라버리는 무화과 이파리 대신에 반영구적인 가죽으로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를 가려주기 위한 구약의 대속 제물과,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豫表)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를 뽑아버리지 아니하시고 다만 그 가는 길목을 차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는 분명히 어딘가에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는 생명나무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그 중에서도 맨 마지막 장인 21장에서 생명나무가 어디 있는가를 알려줍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1:1-2)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타락으로 차단되었던 생명나무가 요한계시록 맨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의 목표가 어디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생명나무가 어떻게 자라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생명수를 먹고 자라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 수가샘터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우리 주님 자신이 영원히 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생명나무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생명나무가 자라는 하나님 나라는 어디 있습니까? 영적 생명을 회복한 성도들의 삶 자체가 곧 하나님 나라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인정하는 그곳이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영적 생명을 잃었을 때는 생명나무 역시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십자가의 피로 죄가 씻어져서 영적 생명이 회복될 때 비로소 생명나무의 열매가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되고 또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육체를 흙으로 돌려보내고 난 다음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종노릇 하는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21) 땅과 자연 모든 피조물들이 탄식하며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 죽었던 영이 살아나고 참 자유인이 될 때 우리로 말미암아 저주받았던 자연도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책임이 바로 우리 자신들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탄의 지배 하에서 사망 권세 휘둘리며 그저 육신의 안녕만을 바라며 전전긍긍하는 우리들을 위하여 죽음의 왕 사탄과 싸우셨고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시작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타락과 함께 단절되었던 영원하신 하나님의 창조가 새롭게 시작된 것입니다. 인생살이에는 반드시 수고와 고통이 수반됩니다. 거저 먹기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조랑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고통과 수고를 장차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태울 천마를 다루는 훈련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올해도 비록 조랑말이지만 열심히 천성을 향해 열심히 달려갑시다. 그리하여 마침내 백마를 탄 예수님과 함께 천성을 맘껏 달려 보기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