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벌이란 무엇인가?

새벽지기1 2016. 8. 5. 10:54


“죄 따로. 벌 따로” 죄가 먼저이고 나중에 그 죄를 심판하여 벌이 내려집니다. 이것이 죄와 벌에 대한 일반적 견해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벌을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죄와 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과는 전혀 다릅니다. 죄와 벌은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입니다.


죄의 발각 여부에 관계없이, 죄를 지어 어두움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 자체가 심판이요 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죄와 벌에 대한 생각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내리신 벌을 죄의 결과로 보지 마시고, 그 죄에 수반되어 있는 어두움으로 파악하면 죄와 벌의 새로운 차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은 회개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처한 어두움을 시편 32편에서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시 32:3-4) 죄는 언제나 죄 지은 사람을 어두움으로 몰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남을 미워하는 자마저 살인의 죄를 범한 것이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저 간음의 죄를 범한 것으로 보았던 것은, 그래서 더 많은 범죄자를 만들고, 더 깊은 자책감을 느끼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어두움 속에서 힘들어 하는 영혼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 원인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과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버린 뱀과 아담과 이브가 처한 어두움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뱀은 모든 짐승들 보다 더 저주를 받은 처지가 되었습니다.“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 3:14) 사탄의 미래입니다. 배로 다니며 흙을 먹는다는 것은 가장 천박하고 더러운 일에만 몰두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하는 일에는 그 어떤 고귀한 것도, 창조적인 것도, 배려나 동정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떤 범죄 앞에서 인간으로서 어쩌면 저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몸서리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 모두 사탄의 속삭임에 넘어갔을 때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선과 악의 끝없는 투쟁에 대한 예고입니다. 흔히 선이 악을 이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악은 선의 발꿈치만을 상하게 할 뿐, 결정적으로 선은 악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는 당부가 기독교 전체를 관통하는 있는 것이며,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사탄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가장 큰 어두움 속에 처하다가, 종래에는 무저갱으로 던져집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4) 육체가 죽는 첫 번째 사망이 불못에 던져진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어지고 영원한 벌에 처해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인생이 이 땅에서 삶이 전부라면 대충 살다가 사라져 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사망 자체가 없어져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내가 어느 편에 서있는가를 확인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절대로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이브가 죄의 결과로 처하게 될 첫 번째 어두움은 산고입니다. 흔히 듣는 질문입니다. 에덴에서도 출산이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이 없었다면 가인과 아벨은 에덴동산에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산고를 크게 더한다는 것은 에덴에서도 산고는 있었을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이 구절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자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여자를 다스린다는 말은 언뜻 들으면 당연한 것처럼 들립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들여다보면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식사 준비를 하고 출근 준비도 하고 화장도 하고 때로는 애교도 부립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남편이 아내를 나무랍니다. 한편 남편은 집안과 아내를 다스리고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더욱 두드러집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는 삶”의 형태가 당연하고 것이 아니라, 타락의 결과라는 점입니다. 저주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방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가정을 만드신 분입니다. 세상과 인생을 꿰뚫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처방은 언제나 유효합니다. 얽히고 섥혀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가정문제는 창세기 2:24절 말씀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부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합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나라의 주체요 에덴동산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가 바로 설 때 비로소 어떤 복잡한 가정사라도 풀립니다.


부부가 중심이 된 가정을 바로 세우는 처방은 에베소서 5:22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 하나님께서는 아내들에게 먼저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내가 남편보다 더 현명하고 강하고 거룩한 돕는 배필임을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상태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주는 것은 사모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종을 남편에게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복종은 현대인들에게 어감이 좋지 않습니다. 복종의 원 뜻은 “존경”과 “인정”입니다.


주님의 창조의 목적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못난 남편을 존경할 수 있으며, 그 못난 남편을 존경하기 시작할 때에 남편은 비로소 서서히 존경받는 대상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처방을 내리십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사랑은 남편들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범죄한 아담이 처한 어두움을 말합니다. 노동은 결코 저주가 아닙니다. 다만 노동의 본질을 모른 채, 단순히 호구지책으로 전락할 때 노동은 힘든 것이며 따분한 것입니다. 노동이 가져다주는 물질과 부만 평가할 때에는 노동의 기쁨은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직업을 영어로 Vocation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Calling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감사하며 일할 때 노동은 하나님의 둘도 없는 축복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저주스러운 형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심으로 십자가에 담긴 모든 저주를 감당하시고 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아내는 남편을 인정하고 존경할 때 남편은 아내를 목숨 걸고 사랑합니다. 내가 하는 일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감사함으로 일합니다. 그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모든 저주가 풀리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한 에덴동산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