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의 목적은, 여기저기 굴러다녀도 깨지지 않는, 누구보다 큰 황금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튼튼한 날개를 달아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한 땅의 세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가득한 하늘의 세계로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육안으로만 보는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 끝은 파멸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린 사람은 중심과 본질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사탄은 그래서 한사코 거짓으로 우리들의 눈을 가리려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도저히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분명히 모를 거야.” 그래서 계속하여 자신의 죄를 은폐할 방도를 강구합니다. 이렇게 귀한 생명과 시간은 죄의 은폐방법을 찾는데 허비되어 버립니다. 그럴듯한 말과 표정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그리고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자신을 숨겨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3:20)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무화과 잎사귀로 자신의 죄를 가린 아담과 이브 앞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조용히 아담을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은 머리를 조아리며 하나님 앞에 섰고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이 아담의 대답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대답에 담긴 숨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두려움’입니다. 죄는 반드시 두려움을 낳습니다. 이것은 필연(必然)입니다. 단순히 죄가 들통 나서 망신을 당할까봐 벌을 받을까봐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죄가 두려움을 낳는 것은 더 깊은 영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두 번째, 죄가 무서운 것은 본질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그늘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으므로’ 두려웠던 것입니다. 사탄은 중심을 보는 눈마저 가려버렸습니다. 실패의 진짜 원인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실패의 원인을 바로 알면, 회복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본질을 빗나간 아담의 대답에 하나님께서 다시 조용히 물으십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의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창 3:11) 하나님의 관심은 징계에 있지 않습니다. 살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생명의 창조와 생명의 성장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치유와 변화와 성장이 하나님의 주요 관심사입니다.
지금 아담은 타락이냐 구원이냐의 갈림길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아담의 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따먹었다고 시인하면 끝장이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알지?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어. 100% 죽는다는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아담의 눈에는 사랑의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진노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만 보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심판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아담이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의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이 대답이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지 깨달으셔야 합니다. 이 대답에는 타락의 가장 추한 최종적인 모습을 몽땅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죄의 최종적이 모습은 “책임전가”입니다. 아담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합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셔서”라고 말합니다. 나는 별로 원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주셔서 이브가 나왔고, 그래서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모양인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이야. 흔히 듣는 말입니다. 아담은 이어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저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내 잘못은 없습니다. 저 여자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실과를 내게 주므로”라고 말합니다. 그 실과, 하나님이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만들어 놓았느냐, 애초부터 없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 이런 것이 내 눈 앞에 있어서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대답에는 “할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먹었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은 아담의 얼토당토하지 않은 말을 다 들으셨습니다. 아담이 가리키는 이브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창 3:13) 하나님께서 이브에게 또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브는 아담의 돕는 배필입니다. 이브가 잘 대답하였으면, 에덴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잘 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러나 불행히도 이브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고, 그 책임을 뱀에게 돌려버렸습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3) 유혹한 뱀이 문제가 아니라 유혹 당한 나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여자와 그 실과 뒤에 숨어있는 나,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나, 뱀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 내가 문제입니다.
첫째,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둘째, 본능적으로 내 자신을 은폐하고 숨기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셋째, 내 자신을 끝없이 합리화하며 남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이 세 가지가 죄지은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특징들입니다.
구원은, 다시 돌아와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가장 중요합니다. 회개는 타락한 나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며 문제의 핵심적인 본질을 보는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중독, 도박중독 등을 고치는 가장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중독자임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나를 사로잡은 중독에서 벗어나는 첫발을 떼는 것입니다. 죄는 헬라어로 ‘하마르티아’라고 합니다. 그 원래 뜻은 ‘과녁에서 빗나가다.’입니다. 과녁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라는 과녁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내 자신을 하나님을 향하여 날릴 수 있습니다. 거기에 바로 에덴동산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잃어버린 태초의 그 영적 빛을 밝혀 우리를 비추사, 사탄의 존재를 직시하게 하고, 죄로 얼룩진 내 모습, 책임전가와 은폐에 온 힘을 탕진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세상에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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