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홍수는 전 지구적인 사건입니다. 성경에는 땅이 형성되는 과정이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지 창조 때, 궁창 아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면서 드러나는 땅(창 1:9)이고, 노아의 홍수 때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리면서 만들어진 땅(창7:11-8:5)입니다. 만약 노아의 홍수가 지구 전체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처음 땅과 홍수 기간 중에 형성된 땅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하며, 그 차이와 흔적들을 세계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구상 어느 곳에서든지 이러한 증거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두 땅과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화석입니다. 홍수로 인하여 생물의 엄청난 개체가 일시에 매몰되었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에 대한 창조론의 장당성과 성경의 무오류를 증명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터무니없는 신화가 아니며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책임을 상기하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통찰력이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통찰력은 그저 앞날을 예측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통찰력’이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오는 것입니다. 땅의 일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하늘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늘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력, 즉 ‘영적 통찰력’입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십니다. 단 하나의 관점입니다. 즉, “은혜 가운데 있는가. 아니면 은혜 밖에 있는가?”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관점입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 안에 있다고 판단되면 내 편이라고 생각하고, 은혜 밖에 있다고 여겨지면 적으로 간주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은 은혜 안에 있으면 기뻐하며, 은혜 밖에 있으면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 관점이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예수님의 시각으로 한 번 바라보십시오. 비록 그가 큰 힘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는 ‘은혜 밖에 있는 곤고한 사람’이며, 지금 현재 그의 삶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처해 있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내가 도와주어야 할 대상입니다. 내 도움을 거절합니까? 그를 위하여 기도라도 하십시오. 이러한 태도가 엄청난 영적통찰력을 갖게 합니다. 그 사람은 권력과 힘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히 11:38)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한 끝없는 ‘구별의 역사’입니다. 빛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부터 구별하셨고 생명 중에 특별히 인간을 구별하셨고, 시간 중에 특별히 안식일을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을 구별하셨고, 방주 안과 방주 밖을 구별하셨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바로 구별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의 다양함은 곧 ‘혼란(混亂)’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요구하신 구별은 바로 ‘생명 있는 구별’, 그들은 죽었으나 노아는 살았던 것 같이 ‘살아있는 구별’입니다. 생명 있는 구별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너와 네 온 집이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창 7:1)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의로움을 보셨고 그래서 노아와 노아가족들을 방주에 태우셨습니다. 의로움이 관건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불의하였으나 노아만이 의로웠습니다. 그런데 누가 의로운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의로움과 하나님께서 규정하시는 의로움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음과 같이 판단하십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성경에서의 악은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를 파괴하는 일체의 행위’를 말합니다.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제일 큰 계명은,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며, 두 번째 계명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마 22:40) 이것이 모든 기독교 강령의 본질입니다. 이 순서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규정에 위배되면 모두 죄입니다. 먹고 마시고 돈 벌고 결혼하는 것 자체가 악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살라하신 것은 내가 살고 내 삶이 더욱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엄청난 방주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노아가 감당해야할 일이었습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니라.”(창 6:22) 준행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아샤’는 행하면 나중에 그 뜻을 알게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노아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일단 톱과 망치를 들고 시작하였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7:5)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일단 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그 때부터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 안에 들어가게 되고 놀라운 기적들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아샤’의 세계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내가 버리지 못하는 내 기준, 내 생각을 내 어깨에 달라붙어 나를 괴롭히고 있는 도마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도마뱀을 죽일 때만이 나는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도마뱀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이 마침내 외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도마뱀이 변하여 천상을 나는 용마로 변한 것입니다. 그 사람을 실고 천상을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이것이 내 생각, 내 기준을 하나님의 생각과 기준으로 바꿀 때 일어나는 아샤의 기적입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신앙은 능력과는 거리가 멀까요? 여기에는 아주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인정하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착각입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막강함을 잘 아는 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탄에게 믿음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귀신들이 한결같이 한 말이 있습니다. “저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저를 내버려 두소서.”였습니다. 사탄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존재를 알았지만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존재, 예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사람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노아만이 그 약속을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과 상관이 있게 되었고, 노아의 그러한 자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었습니다. 노아의 홍수사건은 그 옛날 일어났던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도 끝없이 내 안에서 홍수사건이 일어나서 생명 없는 것들은 씻겨 지고 진정한 생명만이 남아있도록 해야 합니다. 홍수사건의 본질은 죄 씻음입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태어나는 거듭남의 사건입니다. 홍수사건은 이집트와 가나안을 구별하는 또 다른 홍해 사건이며 심판과 구원을 구별하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 교회가 참 구원의 방주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모든 부정한 것을 던져버리고 오직 성결함와 거룩함으로 가득 채우는 진실한 하나님의 선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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