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교리해설

[라은성 교수의 쉬운 교리해설] (9)영원한 작정과 비밀적 예정①

새벽지기1 2016. 7. 9. 09:13


예정과 자발성 동시에 인정해야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은 질문을 받는 것들 중 하나는 예정론에 관한 것이고, 개혁신앙에서 가장 위험한 질문도 예정론에 관한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신비하고 비밀적 사역에 대해 인간 이성으로 이해하고 설득해보고자 하는데서 비롯된다. 또한 하나님의 영역을 인간이 침범하려 시도하는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호기심을 만족시키고자 하지만 진리는 인간 이성 너머에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경건한 자는 진리를 배우는 것과 이해하고자 하는 경계선을 잘 유지해야 한다.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면서 강조한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진리는 설명이지, 이해하는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맹목적 신앙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설명하기 위해 배움은 언제든 바람직하지만, 이해를 위한 욕구는 늘 위험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 이해에 중점을 두는 것은 교회 역사적으로 언제든 있었다. 심지어 종교개혁 이후에도 소찌니주의 외에도 개혁교회 내에 아르미니우스파 논쟁은 예정론이 가장 뜨거운 신학주제였다. 그 결과로 작성된 <돌드레히트신조>, 그 중에서도 예정론을 다루는 1장 6~18항를 통해 우리는 구체적인 예정론의 지침을 파악할 수 있다.

예정론을 설명하기 전에 기억해야 하는 한 가지는 칼빈이 예정론을 3권 21~23장에서 비로소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가 교회에 관한 설명인 4권을 앞두고 예정론을 다루는 이유는 어떤 자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로 불러 모으는지 알리기 위함이다. 매우 목회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54문은 교회론 질문(53문) 다음에 위치해 있고, <사도신경>의 교회론 부분을 다루면서 예정론을 잠시 언급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를 공격하면서 어떤 자를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유기하셨는지를 설명한다. 누구에게는 믿는 은혜를 주시고, 나머지에게는 그렇지 않은지를 설명하면서 예정론을 자세히 다룬다. 따라서 순서상 교회론 이전에 예정론을 다루는 것이 옳고, 성령 하나님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본다.

이와는 달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7~8문,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12~14문, <벨지카> 6항은 삼위일체를 다룬 후 질문하고 고백한다. 그러면 교회론과 함께 다루는 것과 삼위일체론을 다룬 후 예정론을 다루는 차이점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이렇다. 구속 사역을 성령 하나님께서 수행하시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성을 다룬 후 자연스럽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인 작정과 예정을 다루는 것이 적당하다고 여겨진다. 공통점은 성취된 구속 사역을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뤄 가시는지를 말하고자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예정론을 설명할 때 먼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는 것이기에 ‘불가해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불가지’와 ‘불가해’의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을 혼동하여 맹신을 강요하는 것이라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는 만큼 그분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있기에 ‘불가지’는 아니지만, 인간 이성을 판단 기준으로 삼으려는 자세에서는 ‘불가해’라고 말해야 한다. 예정론은 인간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에, 이것을 우리가 설명할 때 수용하고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둘째, 인간의 조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조건적’이라는 것이다. 영원이란 시간적 개념이 아니기에 우리의 상황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조건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베소서 1장 4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셋째, ‘불변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예측하고 싶어 하기에 때와 형편에 따라 수정해 간다. 하지만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불변하다. 이것에 대해 늘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경건한 자는 임할 것이다.

넷째, ‘공정하다’는 것이다. 공의로운 하나님은 누구도 불평과 시비가 없도록 행하기에 심판자가 되신다. 경건한 자에게 큰 위로가 되는 진리다. 시편을 통해 늘 발견할 수 있는 보화는 공의롭고 공정한 심판자 하나님에 대해 성도들이 고백하는 심정과 자세이다. 여기서 깊고 넓고 높은 위로를 맛보게 된다.

끝으로 작정 또는 예정과 우리의자발성을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어느 한 쪽에서 다른 하나를 바라본다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를 동시에 인정하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권면처럼 예정론 역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를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이럴 때 예정론에 대해 일어나는 모든 의문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또 숙명과 예정을 혼동하여 숙명적으로 예정론 신앙을 적용시키는 위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 한계선이 애매모호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은 두 가지 영역을 동시에 인정하고 균형을 잡으려는 것과 그렇지 않는데 있다고 하겠다.
 

라은성 교수  opinion@kid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