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우스 폰 센덴(Marius von Senden)은 ‘공간과 시력’이라는 책에서 시력을 회복한 사람들이 경험한 놀라운 일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엄청난 당혹감입니다.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빛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인데 어찌 당혹스럽지 않겠습니까? 한 소녀에게 엄마의 크기가 얼마만한가 물었을 때 두 뼘 정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거리를 두고 있는 엄마가 그 정도의 크기로 보인 것입니다. 공간과 형태, 움직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없어서입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얼마나 높은 것인지 전혀 실감하지 못했고, 그래서 실제로 뛰어내려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높은 산도 그저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정도의 작은 것으로, 태양도 그저 동전 크기로 생각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물을 총체적으로 그 크기와 거리, 색과 명암 등 종합하여 이해하는 능력이 대단히 부족하였다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난 다음에는 피나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 했습니다. 그동안 세상을 인식하던 통로가 폐쇄되고, 전혀 새로운 차원의 길을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전혀 다른 차원,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마치 시력을 회복한 사람이 3차원의 세계를 보는 훈련이 필요하듯이, 성서를 읽는데도 다른 관점과 이에 따른 훈련이 필수적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할까요?
서양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듣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에 관한 것입니다. 히브리적 사고는 통전적입니다. 전체를 묶어 봅니다. 반면 헬라적 사고는 대단히 분석적이어서, 세세히 쪼개서 봅니다. 또한 히브리적 사고는 감성적이고, 직관을 중시합니다. 반면 헬라적 사고는 논리적이며, 합리적입니다.
히브리어는 어휘가 가장 빈약한 언어로 약 2만 단어정도 됩니다. 반면 헬라어는 20만 단어 이상이나 되는 풍부한 어휘를 가진 발달한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어를 택하여 하나님의 세계를 열어주셨습니다.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언어는 곧 사고이며, 인식의 결과입니다.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그러므로 히브리적 사고로 접근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헬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히브리적 사고는 대단히 비논리적이고, 황당하고, 우습고, 미신적인 것으로까지 비쳐집니다. 그런데 귀담아들어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에릭 프롬이 ‘잃어버린 신화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현대인의 불행은 신화를 잃어버린 데서 시작합니다. 현대인의 기준으로 볼 때, 신화는 불합리한 사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신화를 버렸는데. 동시에 그 신화 가운데 감추어진 행복에 이르는 지혜 역시 폐기처분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고대인의 관점으로 돌아가서, 왜 그런 신화를 말하였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 지혜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를 잃어도 지혜를 얻지 못하는데, 성경을 잃으면 이 세상은 끝입니다. 성경은 1,500년에 걸쳐서 40명의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된 책입니다. 구약은 39권, 신약은 27권입니다. 이 40명의 성서기자들의 직업은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왕에서부터 농부, 양치기, 어부 등등, 너무나 다양합니다. 또한 서로 다른 시기에 살았던, 한 번도 서로 만나본적 없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통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How를 묻지만, 히브리사람들은 Why를 묻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보기에 잔인한 일들을 명령합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그럴 수 있어?”라고 반문하는 것은 헬라적 사고입니다. 반면 히브리인들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분이 왜 그런 잔인한 명령을 하셨는가?”를 숙고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깊고 심오한 뜻을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오묘한 세계를 히브리어로 기록하게 하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부르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합니다. 세상은 그 미움을 분석하고 원인을 따집니다. 바로 헬라적 방법입니다. 아무리 원인과 이유를 밝히 알았다고 해도 그 미움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이야기 속에서 그 미움의 의미가 드러나고 또한 용해됩니다. 그 어떤 고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시편기자의 말대로 우리들의 체질을 너무나 밝히 아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낱낱이 밝히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를 질타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선한 일이란 무엇일까요? ‘선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아가토스’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가치 있는, 덕스러운, 나은, 공정한, 정직한 이란 뜻 외에도 풍성한 이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1) 선한 일이란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입니다. 그 일을 할 때 생명이 살고 더욱 풍성해 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 성경은 ‘하늘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땅의 일은 땅의 지혜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하늘의 지혜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그래서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이 더욱 풍성해지는 길을 한번 가보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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