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죽음너머 하나님 세계로 인도하시는 성령

새벽지기1 2016. 6. 20. 08:53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8) 여러분은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대부분 사도바울처럼 담대하지 못하기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끝이며, 또한 죽음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 큐블러 로스 박사에 의해 시작된 죽음학은 놀라운 발전을 하여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인간들의 인식이 넓어졌습니다. 학자들이 말하는 죽음의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유체이탈 경험. 즉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어 죽은 자신의 몸을 보았습니다. 둘째, 터널로 들어가거나 터널을 통과하였습니다. 이것이 죽음에서 유일한 무서운 경험입니다. 셋째, 눈부신 신비로운 빛과 만났습니다. 그 빛이 자신을 반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넷째, 주마등처럼 과거의 삶을 회고하였습니다. 다섯째, 세상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비현실적인 영역을 접했습니다. 여섯째, 특별한 지식을 순간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일곱째, 모든 감각이 매우 예민해졌는데, 그 느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대단히 긍정적이었습니다. 여덟째, 되돌아가라는 느낌을 받았을 때, 그냥 거기에 남아 있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과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죽음의 체험을 하고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변화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다리는 것이 되었고, 다시 죽게 되었을 때 마치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양 기뻐했습니다. 자신감이 늘었고 영성은 더 강해졌으며 물질이나 지위나 권력에 대한 집착은 사라지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 기꺼이 돕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즐겁게 살려고 노력하며 남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에 더 열심을 내며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나눠주었습니다. 삶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신념, 삶의 의미나 목적에 대한 인식이 깊어졌습니다. 영적인 관심이 높아져 종교에 헌신하였지만 자신이 믿고 있던 기존 종교에 대해서 소홀해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종교의 가르침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직업관도 바뀌어 돈을 많이 벌려고만 하던 이전과 달리, 자신의 직업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직업에 더 이상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잘 나가던 직업이라도 포기하고 새 직업을 구했고, 그 직업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바로 ‘사랑’이었고, 사랑을 실천하다가 다시 죽게 되었을 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죽음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변화가 곧 예수님께서 우리더러 살라는 ‘참 삶’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5) 이 말씀의 뜻은 성령께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정확히 가르쳐 주신다는 것이고, 이 말씀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이 땅에서의 삶은 여행이며, 육체는 여행에 필요한 텐트일 뿐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고후 5:1) 죽음은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죽음 이후 돌아갈 영원하면서도 행복한 집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의 삶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즉 진정한 Well-Being은 Well-Dying의 문제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때만 제대로 올바로 살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죽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내 삶이 완성에 이르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무엇을 벗고 무엇을 입는다는 것일까요? 요한계시록에서는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복장인 ‘세마포의 흰 옷’(계 19:8)이라고 표현했고, 사도바울은 ‘신령한 몸’(고전 15:44)이라고 하였습니다. 누추하고 제약이 많았던 이 땅에서의 내 삶이 죽음 이후 하나님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여 완성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최준식 교수가 쓴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죽음학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일 두 가지를 가르쳐줍니다. 바로 ‘증오심을 버리는 일과 용서를 구하는 일’입니다. 최 교수는 이 증오와 원한을 ‘마음의 어혈’이라 하였습니다. 이 어혈은 마음과 영혼에 나쁜 작용을 합니다. 영혼에는 각자의 주파수가 있다고 합니다. 육신을 벗고 나면 그 주파수가 같은 영혼끼리 모이는데, 악한 주파수의 소유자들이 모인 곳이 곧 지옥이고 선한 주파수의 소유자들이 모인 곳이 곧 천국입니다. 그래서 사후생에는 자연히 계층이 있게 마련입니다. C.S. 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이나 스캇 펙 박사의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이나 스베덴 보리의 ‘천상 일기’나 모두 그 계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 아름다운 자유와 생명의 옷을 입을까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요한 계시록에는 더욱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계 19:8)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 때, 우리들은 낡고 더럽고 무거운 이 세상의 옷을 벗고 깨끗한 세마포의 자유와 생명의 옷을 입게 됩니다. 제프리 롱 이 쓴 ‘죽음, 그 이후에’에 한 남자의 증언이 있습니다. “다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더러운 옷을 다시 입는 것 같았습니다.”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기 위해서 증오심을 버리고 용서하는 것 외에 정말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곧 긍휼한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은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 덕분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들에게 긍휼을 베풀라고 하심입니다. 힘 모아 최고의 긍휼을 이웃에게 베풀며 사시기를, 그리하여 눈부신 세마포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서 함께 춤을 추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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