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순례자의 하나님

새벽지기1 2016. 6. 16. 07:11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잊고 사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본래 순례자들의 종교, 나그네의 종교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엘리야도 나그네였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 아예 나그네의 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철없이 그를 따르겠다고 나서던 어떤 젊은이에게 자신이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길손”임을 일러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회심한 후 일생동안 시리아로, 소아시아로, 그리스로, 그리고 로마로 떠돌이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거리의 사람들’이라 불렀습니다.

  

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하나님이 바로 ‘나그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언제나 유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보다 한 발 앞서서 산으로, 들로 옮겨 다니시던 나그네의 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정착하고 난 후에 두고두고 겪은 시련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가나안의 토착종교인 바알종교와의 대결이었습니다. ‘소유’를 뜻하는 ‘바알’이라는 이름의 신은 ‘텃세’의 신이었습니다. 특정 지역과 주민을 지배하는 ‘터줏대감’ 신이었습니다. 때문에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그네의 하나님이신 야훼 하나님을 그와 같이 만들려고 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유혹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예언자들이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이 거창한 성전을 세워 거기에 그분을 ‘모시려’ 할 때에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순례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는 우주가 탄생하고, 인류가 생겨나 끊임없이 문화를 발전시켜 가다가, 그것이 점차 파멸로 귀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12장부터는 돌연 장대한 우주의 파노라마가 아주 소수의 사람들의 방랑기로 전환됩니다.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극적인 장면의 전환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 살았습니다. 이 지역은 당시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생각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지였습니다. 여기서 출발한 아브라함은 정처 없이 떠돌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옵니다. 이곳은 변두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중심’에서부터 ‘주변’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다수자의 문화’로부터 ‘소수자의 문화’로 부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자기의 결정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무어라 평가할지 상관하지 않고 그냥 떠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순례자는 영어로 ‘필그림’(pilgrim)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페르 아그룸’(per agrum)인데, 그 뜻은 ‘들판을 가로질러’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성스러운 목적을 위해 대지를 걷는 나그네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순례란 이렇게 자신의 두 발로, 영혼의 나침반을 따라 ‘대지를 걷는 것’입니다. 걷되, ‘천천히 걷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속도’(speed)에 집착하는 시대입니다. 사실 이 ‘스피드’라는 말처럼 오늘 우리 문명의 병든 곳을 정확히 표현해주는 말도 없습니다. 하지만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밀란 쿤데라’는 그의 유명한 소설 『느림』에서 속도와 기억, 속도와 망각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길을 가다가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하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춥니다. 생각해내기 위해서입니다. ‘느림’과 ‘생각’은 하나라는 말입니다. 반면 길을 가다가 자신이 겪은 어떤 끔찍한 일이 떠오른다고 합시다. 어떻게 하십니까?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빨리 그 생각에서 달아나기 위해서입니다. ‘빠름’과 ‘망각’은 하나라는 말입니다. 빠르면 잊게 됩니다. 빠르면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빠르다는 것, 정신없이 그냥 달린다는 것은 생각 없이 시대의 가치에 순응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스페인에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라는 순례길이 있습니다. ‘성야고보 순례길’이라는 뜻입니다. 순례길 곳곳에는 ‘알베르게’라고 하는 숙소들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가면 소박하지만 잠을 잘 수도 있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례자들은 처음에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들을 잔뜩 싸서 등에 지고 길을 걷습니다. 나름대로 줄이고 줄여서 꼭 필요한 것들만 담는다고 했는데도, 어느새 가방은 묵직하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몇 개의 알베르게를 거치면서 순례자들은 비로소 버리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한 알베르게에서 다른 알베르게까지 오직 빵 두 쪽과 물 한 모금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버리고 비우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우리의 인생길 역시 그렇게 버리고 비우는 길임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우리의 신앙의 순례길을 떠나야 합니다. 순례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아니 신앙 그 자체입니다. 순례와 신앙은 동의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 안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이기고,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순례길에서 다음의 네 가지를 버리게 됩니다. 첫째, 길들여진 습관에 대한 익숙함입니다. 둘째, 과거의 업적에 대한 도취입니다. 셋째, 이미 획득한 소유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리고 넷째, 미래에 대한 불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새 생명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네 가지를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기독교는 순례자의 종교, 나그네의 종교입니다. 나그네란 누구입니까? 나그네란 ‘새로운 변화에 열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그네의 하나님이신 것도 바로 이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옛 것에 집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일을 꾸미십니다. 이사야 43:18-19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누가 이 은총에 가장 잘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순례하는 사람입니다. 버릴 줄 알고 비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순례를 멈추지 마십시오. 오늘날 한국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소위 ‘가나안 성도’ 현상은 우리에게 기성의 교회 너머의 새로운 교회를 상상해보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조그만 터전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이기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도 그분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의 새 생명의 길을 가는 길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