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영국의 경건주의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1892)목사는 ‘설교의 황태자’라고도 불렸던 유명한 목사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주 경건한 신앙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연가’였습니다. 언뜻 이해가 안 됩니다. 경건하기로 소문난, 그것도 목사가 ‘골초’였다는 것은 당황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이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질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펄전 목사는 ‘담배를 피우는 것은 전혀 신앙의 본질이 아니다. 전혀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 자유해야한다.’ 늘 이렇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펄전 목사가 자주 가던 담배 가게 앞에, ‘스펄전 목사가 즐겨 피우는 담배를 파는 곳’이라는 광고가 나붙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스펄전 목사는, 그 뒤로 담배를 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그 교회의 애연가들 사이에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이런 그들에게 ‘내가 담배를 피우는 거야 나는 상관없는데, 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피우게 되면, 그들의 건강이 나빠지는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니, 이제 내가 삼가 하는 것이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영적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불리는 책입니다. 그 중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 5:13)는 말씀은 핵심이 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분명히 말해줍니다. 첫째는, 우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는 자유자이만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상반되는 듯한 두 진술은, 참된 성도의 삶을 제시하며, 복음의 진수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 둘이 균형을 잃어버림으로써, 많은 이단들이 발생하였습니다. 한쪽만 강조하고, 한쪽으로 치우치면 신앙은 왜곡되고 변질되고 맙니다. 먼저,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 가운데 여전히 자유하지 못하고, 자유를 오히려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본성에는 종교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의 노력과 행위를 통해 신을 감동시켜,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율법주의’입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혹은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 기도, 봉사, 전도, 헌금을 비롯한 선한 행위를 쌓아 하나님을 움직이려는 태도입니다.
참 성도의 삶은 은혜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조건과 자격을 구비하고, 어떤 행위와 공로를 쌓고, 사랑받을 만한 일을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이 은혜에 대한 눈이 열리면, 우리의 어떤 행위나 모습과도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율법에 대해서, 죄와 죽음에 대해서 참된 자유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자의 모습입니다.
다음으로,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남용하여, 방종에 이를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자유라는 명분아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육체의 기회로 삼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체의 일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갈 5:19-20) 여기에 여러 가지 항목들이 열거되는데, 크게 셋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적 타락과 방종입니다. 우리 인간의 적나라한 육체적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성적타락입니다.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죄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에 몰두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십계명의 제2계명과 같이, 우상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서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경고합니다. 셋째, 관계의 파괴로 나타납니다. 관계의 파괴와 단절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 인간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이 세상에 연합, 일치, 하나됨의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관계가 깨어지고 단절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육신을 입고 사는 우리는 육체의 일에 쉽게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교묘하고 강력해서 끊어버리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육체의 일을 버리고, 참된 자유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사도바울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처방을 내려줍니다. 우리가 얻은 이 자유를 지키고, 이 자유를 누리는 유일한 방법은, 역설적이지만 ‘종노릇’하는 것 입니다.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자발적으로 서로 섬기라’는 말입니다. 결코 억지로가 아닌, 두려워서가 아닌, 나의 어떤 유익을 위해서도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자발적인 응답으로 섬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문 밖에서 서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문을 꼭꼭 잠그고 있어도, 얼마든지 우리 속에 들어올 수 있는 분입니다. 못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우리를 종처럼 대하시거나, 강제로 또는 위협적으로 무엇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깨닫고, 우리 스스로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마음을 담아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그 분과 먹고 마시며 그 분의 뜻을 따라 기꺼이 섬김과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사랑하면, 구속은 더 이상 억압이나 고통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상대가 기뻐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구약의 모든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고, 참된 자유자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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