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평강과 기쁨을 주시는 성령

새벽지기1 2016. 6. 8. 22:18


음악가들이 감동적인 연주를 하기위해서는 오랜 시간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음악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 전반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의 성품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성품은 기술이나 학문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더 본질적이어서 인생의 성패를 결정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총체적인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이 말은 우리 모두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무엇에든지 참되고, 옳으며, 정결한가?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받고 있는가? 여기서 ‘기림’이란 칭송과 찬양을 뜻하는데, 덕을 쌓고 또한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더라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빌 4:9) 곧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노라면 자연히 사랑받고 존경받고 칭찬받을만한 사람이 되고 “평강의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 계시리라”(빌 4:9)는 것입니다.

  

성실하고 따뜻하고 깊이도 있는 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평생 동안 착실하게 모은 재산을 주식을 하다가 모두 날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그 친구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돈에 집착하다가 그 꼴이 된 것입니다. 그 친구를 보며, 참 신앙을 갖는 것과 ‘평강의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였습니다.

  

‘평강’의 헬라어 ‘에이레네’는 단순히 ‘평화롭고 고요한’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합하다’는 뜻의 ‘에이로’에서 파생한 이 단어는, 가장 먼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며, 그리할 때 자연히 ‘번영’‘고요’‘안식’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며 번영과 고요와 안식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하는 데는 성령에 대한 오해가 큰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성령을 그저 강력한 하나님의 힘으로만 생각해서 성령을 받으면 대박이 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임을 믿으면, 이미 내게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박이 나지 않으니까, 목사는 “성령을 받으라!”고 외치고 교인들은 성령을 달라고 아우성치며, 시간과 생명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와 내 개인의 삶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점에서 넓게 깊게 보아야 합니다.

  

첫째, 내 개인의 삶까지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것의 토대는 사랑과 은혜와 자비로 충만하신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이 세상과 나를 창조하신 목적은 사랑과 영원한 안식입니다.

  

둘째, 성자 예수님께서 오셔서 성부 하나님의 약속에 동참하고 그 은혜를 누리는 방법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과의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그분처럼 살아야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들이 예수님처럼 살도록, 그분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시고 격려하시고 힘주시고 위로하시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생명 길을 가게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성부 하나님께서 세우셨던 하나님나라가 성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가운데 ‘이미’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그러나 ‘아직’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순절에 임하신 것은,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된 하나님나라가 언젠가는 반드시 완성될 것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았습니다. 이는 곧 그들이 땅을 딛고 살았지만 하나님나라를 산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천국과 곧바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불안한 것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보증이 있다면 오늘의 어려움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나라와 완성될 하나님나라 사이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핵심 중의 핵심 존재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반드시 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살아야 할 삶의 형태는 확정되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모를 때는 예수님을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더 난해한 문제라도 성령께서 반드시 가르쳐주십니다.

  

고린도교회가 개척자인 바울파, 현재 목회자인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분열하여 심각하게 싸우고 있을 때,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 편지를 씁니다. 보통사람이라면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편을 들겠지만 하나님의 사람인 사도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자신이나 아볼로나 베드로나 모두 동역 자들로서 각자 맡은 일을 감당할 뿐이며,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임을 분명히 합니다.(고전 3:11,7) 이 말씀은 단순히 교회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각자 삶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삶도 그리스도 위에 세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운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그 전보다 나아졌는가, 아름다워졌는가, 신실해졌는가를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질문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왜 하나님은 우리가 아름답게, 진실하게, 신실하게 변화되기를 원하실까요? 우리가 번영과 안식과 고요를 누려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 풍조에 휘둘리며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기뻐하며 거하시도록, 날로 아름다워지시기를…참되시기를…그리하여 하나님의 번영과 안식과 고요를 누리고 베푸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