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공식을 좋아합니다. 공식에 대입하면 어려운 문제를 간단하게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운행을 공식으로 만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끝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는 공식을 만들어내고 가르칩니다. 바리새인들이 만들어낸 2천여 개 조항의 계율은 아무리 정교해도 하나님을 움직여 복을 받아보겠다는 종교적 공식일 뿐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핵심모토는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천년 동안 세상을 지배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그 깊은 사랑과 의미는 사라지고 잡다한 각종 종교행위만 남게 되었으며, 마침내 죽은 사람의 죄도 용서받는다는 면죄부를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의 허구를 무너뜨리고 기독교의 왜곡과 변질을 회복하여 종교의 감옥에 갇힌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려하심입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이며,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이 날로 풍성해지는 사람’(요 10:10)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는 영(롬 8:9)’입니다.
사울왕은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위해 진 치자 그 엄청난 숫자로 인해 더럭 겁이 났습니다. 그는 궁리 끝에 명령을 내려 신접한 여인을 찾아냅니다. 그녀는 왕의 명령대로 영혼을 부르는 굿을 통해 죽은 사무엘을 불러냈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해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선,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의 세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귀신과 죽은 영들이 현실의 세계에 나름의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귀신과 악한 영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의 세계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다음으로 그렇다고 해서 영의 세계를 넘나든다는 사람들을 맹종해서도 안 됩니다. 무시하거나 맹종하거나 모두 사탄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라고 사도요한이 당부합니다.
그렇게 나타난 사무엘은, 백성들을 잘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행치 아니하고 자신의 지위와 이득만을 지키려 한 사울 왕이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언제나 자신의 욕심과 상황에 반응하였고 다윗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였습니다. 이는 믿음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체크 포인트입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3:23) 아무리 정당해도 상대방을 죽이려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죽인다는 것은 실제의 살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비방하고, 음해하고,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려는 것을 말합니다.(마 5:22)
존 로빈슨은 그의 책 ‘예수님의 몸(The Body)’에서 “악이 승리하는 유일한 방식은 사람이 악으로 그것에 보복하고 반응하고 되돌려주어 악의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다. 반대로 악을 흡수하고 그것을 드러내기를 거부하면 악은 자연히 힘을 잃는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가진 사울 왕은 죽고, 오히려 당하고 피하기만 했던 목동 다윗은 살았으며, 그 생명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들의 길흉화복보다는 우리들의 거룩한 성숙과 자녀다운 삶에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실제로 살아나고, 그 생명이 풍성해지는 진짜 진리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끝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라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라고, 거룩한 성숙을 이루어가라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그 길을 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집니다.(요삼 1:2)
정말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자세히 잘 알려줍니다. 그 말씀 중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그야말로 long-suffering(인내심)입니다. 우리들의 자녀를 대하는 태도도, 각자의 삶의 현장이나 인생에서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공의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령을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초자연적 능력으로만 보고, 성령을 받게 되면 한방에 대박이 나는 양 가르칩니다. 큰 문제를 놓고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으라고 몸부림치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응답받았다고 무조건 일을 벌입니다. 일이 좀 풀린다 싶으면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며 물불을 안 가립니다. 그러다가 힘들어집니다. 그래도 문제의 핵심을 보지 못한 채 기도가 부족하고, 믿음과 정성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히면 언제나 떠올려야 하는 생각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입니다. 사람인지라 감정이 앞설 때가 많아서 일을 저지르거나 실수하게 마련입니다. 그 때 묻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곧 정답이 나옵니다. 그러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이것을 일상으로 하는 것을 “하나님 임재 연습”이라고 합니다. 응답받았다고 무모하게 덤비고 확장하다 낭패 당하지 말고 그렇게 해보십시오. 날이 갈수록 실수와 실패는 줄어들고 점점 더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을 체험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도록 스스로를 내어드리게 하시는 분입니다.
인생이란 좋은 선생을 만나 그와 함께 천천히 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 누구보다 크신 예수님, 이미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아무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꾸준히 가노라면 내게서 저절로 풍성한 열매가 열릴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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