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조상들도 1) 그리스도를 그들의 언약의 보증으로 삼았다는 것, 2) 미래의 축복에 대한 모든 소망을 그리스도 안에 두었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마귀의 온갖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한 가지 원리를 담대하게 세우도록 하자. 그것은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구약 혹은 옛 언약은 이 땅의 것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적 생명의 약속을 포함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거룩한 족장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복된 삶을 구했는데, 그것은 이 땅의 삶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보았다. 사도는 이 점을 아주 멋지게 보여 주고 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8-10,13-16).
그들이 바라본 것이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 땅에서 이루어질 소망이었다면, 이루어지지도 않는 약속들을 계속해서 바라본 그들의 처사는 정말이지 목석보다도 더 어리석은 짓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로서 살았다면, 그들이 아브라함을 이어 기업으로 받을 여호와의 약속하신 땅은 과연 어디였는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소유로 약속하신 것은 분명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무덤 이외에는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받지 못했던 것이다(행7:5). 그들은 이러한 사실로써 자기들이 약속의 열매를 죽은 후에 받을 것으로 소망했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야곱이 그 땅에 묻히기를 소망한 것도, 요셉이 수백년이 지나서라도 그 뼈들이 그 땅에 옮겨갈 것을 명령한 것도 그 때문이다.
선지자들도 신자들의 복락을 말씀하지만, 이 땅의 삶에서 볼 수 있는 행복은 거의 흔적조차 나타나지 않으므로, 우리로서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즉,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높이 기리기 위하여, 말하자면, 그것을 세상적인 혜택들의 옷을 입혀서 사람들에게 표현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그 백성들의 생각을 높이 들어올려서 이 땅의 초등학문(갈4:3)과 멸망하는 이 세대를 뛰어넘도록 하고, 그리하여, 장차 올 영적 생명의 복락을 필연적으로 바라보도록 만든 것이다.
특히 두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사66:22-24).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단12:1-2).
다윗의 고백에서 배워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약속하시는 바를 이 세상에서 거의 혹은 전혀 이루지 않으신다는 것을 구약 시대의 거룩한 족장들이 잘 깨닫고 있었다는 것이며, 또한 그들이 마음을 하나님의 성소에게로 높이 들어올려서 이 땅의 삶의 그림자 속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거기에 감추어져 있음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였는데, 그들은 물론 그것을 눈으로 분명히 분별할 수는 없었으나, 믿음으로 깨닫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확신에 의지하며,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될 때가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진술들이 이를 잘 증거해 주고 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75:15).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시92:12-14).
“여호와여 ---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시92:5,7).
여호와께서 유대인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혹은 그들이 스스로 추구했던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배를 채우는 것이나 육체의 쾌락이나, 부귀 영화나, 외형적인 권력이나, 자녀의 축복이나, 기타 자연인이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었다는 식의 사고를 버려야 한다. 그런 사고는 정신 나간 것이요 위험스러운 것이다.
주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천국”을 약속하시지만,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는” 천국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마8:11). 베드로는 그 당시의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들이 복음의 은혜의 상속자들이라 선포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그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었기 때문이었다(행3:25).
주께서는 이를 말씀으로만 증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직접 행동으로도 증거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 순간에, 그는 성도들 가운데 여러 사람들을 자기의 부활에 함께할 가치가 있는 자들로 여기셨고, 그리하여 그들을 살리셔서 예루살렘 성에서 보이게 하신 것이다(마27:52-53). 이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영원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행하시고 당하신 모든 일들이 오늘날 우리 자신들에게와 똑같이 구약의 신자들에게도 해당된다는 확실한 보증을 주신 것이다.
우리들에게, 말하자면, 영생의 불꽃과도 같아서, “우리 기업의 보증”(엡1:14)이라고도 불리는 성령께서 구약의 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거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감히 그들에게서 그 생명의 기업을 빼앗는단 말인가? 성경이 부활과 영혼의 존재를 그렇게도 분명한 증언들을 통해서 인쳐 놓았는데, 그 옛날 사두개인들은 그 두 가지를 모두 부인하는 어리석음에 빠졌으니(마22:23,행23:8),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온 유대 민족이 그렇게도 우둔하여 오늘날 메시야의 지상 왕국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이 복음을 거부한 것에 대한 형벌로 그런 상태에 빠질 것을 예언해 놓고 있다. 그의 의로우신 심판으로, 하늘의 빛이 베풀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의 생각을 어둡게 하셔서 그들 스스로 어둠 속에 빠지게 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모세의 글들을 읽고 계속해서 그 글들을 묵상하지만, 여전히 그 마음이 수건으로 가려져 있어서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비치는 빛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고후3:13-15).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하기 전에는, 계속해서 그렇게 수건에 가려진 상태에서 그리스도와 모세를 할 수 있는 만큼 분리시키려 애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536-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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