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살리시는 영, 성령

새벽지기1 2016. 5. 19. 07:10


일본인 ‘오노다 히로오’라는 사람을 ‘최후의 황군’이라 불렀는데, 거기에는 어처구니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줄도 모르고 필리핀 밀림에서 30년 동안이나 홀로 살았습니다. 1970년 한 일본 사진작가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일본으로 돌아오는 데는 오랜 설득이 필요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항복해서는 안 된다는 일왕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폐기된 명령을 따르다 어이없는 악전고투의 삶을 산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런 일들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고, 신앙과 성령에 관한 한 아주 흔한 일로서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산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종교에서 신과 인간을 중재하는 존재가 제사장들입니다. 개신교에서는 목사들을 제사장으로 섬기며 복 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사장을 자처하는 목사들은 성령님을 자신들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일개 능력으로 격하시키고, 자신들의 안수와 명령으로 성령을 받는다고 가르치며, 평신도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무위로 돌려,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직접 누려야 할 성령의 은혜를 차단하고 제한하는 일로서, 방치하거나 묵과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였으니(중략)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3-14) 예수님께서는 제사장들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율법의 저주가 완전 무효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십계명은 ‘창살’이 아니라 ‘이정표’입니다. 그 방향을 따라서 열심히 가노라면 ‘아브라함의 복’ 즉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누리게 되며,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믿고 열심히 가는 우리들도 사람이기에, 때로는 방향을 잃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하고 엉뚱한 길을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올바른 길을 보여주시고, 격려와 위로로 계속 생명 길을 가게 하시고, 지친 사람들에게 새 힘을 주셔서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기 위해 예수님 대신 성령 하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순절 다락방에 임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확증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외칩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여기서 ‘말세’란 율법의 저주에 놓였던 과거를 말합니다. 제사장들을 신처럼 떠받들며 맹종하던 시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죽음 앞에 벌벌 떨던 시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넘쳐났던 시대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하나님의 비전과 꿈을 꾸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19 이하에는 세 종류의 탄식이 있습니다.

첫째, ‘피조물들의 탄식’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자연을 뜻하는 피조물들이 탄식하며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 자신들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롬 8:19-21)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자녀들의 탄식’입니다.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이는 “아 내가 아직 하나님의 자랑스런 자녀가 되지 못했구나. 저 피조물들이 온전한 나를 간절히 기다리는데 내가 더욱 힘을 내야지.”라는 탄식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함을 간구하며 더욱 겸손하게 더욱 성실히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성령의 탄식’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 하나님께서 잘 하려고 하는 우리들을 안타깝게 또한 어여삐 여기시며 하나님의 열심으로 간구해 주십니다.

   

우리들은 성령을 받았음에도, 피조물들의 탄식은 외면하고, 그저 돈과 건강과 안녕만 탄식합니다. 그 결과 심령은 가뭄의 강바닥처럼 메마르고 갈라집니다. 그 갈급함을 채우겠다고 성령집회, 치유집회, 성경공부 등을 찾아다니며 왜곡된 선동에 감정적으로 채움 받고는 은혜 받았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당연히 얼마 못가 바닥을 드러냅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된 결과를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겔 37:1) 근심과 걱정의 골짜기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갈급한 심령들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자신의 문제만 탄식할 때 마른 뼈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뼈들을 살리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첫째,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겔 37:4)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분, 곧 ‘살아계신 말씀’입니다. 글씨로 적힌 율법 조항이나 교리나 규칙으로서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온 몸으로 보여주신 살아계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살기 시작하면 마른 뼈에 생명이 돌기 시작합니다.

둘째, 성령을 받으면 살아납니다.(겔 37:9) 성령은 목사들의 명령이나 안수에 의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특정 사람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주권적인 하나님 자체이십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씀과 성령으로 마른 뼈를 살리신 이유는 이 땅에서 내 뜻이 형통하고 호의호식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우리 속에 두어 우리로 살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우리가 알게 하시기 위해서”(겔 37:14)입니다.

   

이를 사도바울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화목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17,20)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룰 때, 하나님의 평강 곧 몸과 마음과 영혼을 살리시는 샬롬이 우리를 덮고, 우리로 하여금 서서히 살아남을 보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