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신부를 구하러 이 땅에 오시어, 모든 사람들에게 프러포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결혼 제도를 알아야 합니다.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면 먼저 장인 될 어른을 찾아갑니다. 그 어른이 남자가 마음에 들어 결혼을 허락하면, 남자는 여자에게 포도주 한 잔을 내놓습니다. 만약 여자가 그 포도주를 마시면 결혼을 허락한 것입니다. 그렇게 결혼 허락을 받은 신랑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신혼집을 마련합니다. 그 기간이 대략 1년인데 이를 ‘정혼 기간’이라 말합니다. 1년 후에 다시 와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고 여자와 함께 고향에 마련해둔 신혼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주 한 잔을 따라주셨고, 제자들은 그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우리들도 성찬식에서 포도주를 받았고 마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배우자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처소를 마련하시고 다시 신부인 우리들을 데리러 오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현재 이 땅에서의 삶은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사는 ‘정혼 기간’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정혼 기간 동안 신부에게 달라진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신분이 달라진 것입니다. 한 남자의 아내 될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남자들에게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배우자로서 흠이 될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만 우리더러 당신의 신부요 배우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사야 선지자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2:19-20) 하나님은 ‘영원히’,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로, ‘진실함’으로 우리와 결혼하리라 다짐하십니다. ‘장가들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아라스’는 ‘재혼하다’는 의미인데, 여기에는 훨씬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죄의 용서뿐만 아니라, 신분의 회복까지 포함합니다. 즉 현재까지의 내가 누구이든지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는 더욱 분명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사 54:5) 이렇게 하시는데도 하나님의 프러포즈를 거절한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프러포즈를 거절하고 다른 신을 좇았습니다. 한 눈을 팔았습니다. 그 이름은 바알입니다. 바알은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풍요와 번영의 신’입니다. 떠돌이 유랑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자 눈이 휘둥그레 졌습니다. 도시가 화려하고 물자가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그 풍요를 누리고자 바알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서 호세아 선지자가 경고합니다. “저희는 번영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중략) 저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행음하여도 수효가 더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 좇기를 그쳤음이니라.”(호 4:6-10)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풍요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한눈을 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적인 복을 바라는 기복신앙은 사악하고, 잘못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배우자로서 올바로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결혼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합니다. 결혼은 두 단계에서 이뤄지는 사건입니다. 결혼의 첫 단계는 상대방에 대해 원초적 ‘감동’, ‘감탄’, 새로운 ‘기쁨’(창2:23)을 갖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떠남’(창2:24)입니다. 곧 한 몸을 이룬 사람의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여정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부들이 불행한 이유는 자기애와 집착에 머물러 새로운 차원으로 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는 일이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강화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질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5-57)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고 그 말씀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권고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 예레미야가 말합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입니다.”(렘 15:16)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이고 그분만을 열망했던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깨닫고, 말씀대로 살면, 그분이 어떤 분인지 감동하고 감탄하고 하나님의 샬롬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과 함께 전혀 새로운 차원의 여정을 떠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참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처소를 마련하시고는 다시 와서 우리들을 데리고 가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더러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중요하고 신나는 약속입니다. 그 분의 약속을 믿고, 염려하지 말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노라면 하나님께서 순종을 이끌어내시고, 의지를 변화시키고, 찬양을 이끌어내시고, 마침내 춤을 추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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