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새벽지기1 2016. 5. 5. 19:28


1960년대 어느 날, 솔제니친이라는 구소련의 작가가 “공산주의는 사기다!”라고 선언하였고, 그 일로 인해 십 수 년을 동토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에서 노역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연필과 공책도 없는 그곳에서 오직 암기로 많은 작품을 썼고, ‘수용소군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등의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탑니다. 그의 작품 구석구석에는 그 어두운 시대를 밝히고, 그 춥고 삭막한 곳을 녹이는 따뜻한 웃음과 밝은 소망이 보석처럼 박혀 있습니다. 폭로와 비판으로 일관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자녀가 되리라.”(요 12:35-36)

   

2000년 전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 빛은 세상이나 사람들의 빛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태양이 뜨면 모든 빛들이 그 광채를 잃듯이 그동안 세상을 부분적으로 밝혔던 성현들의 빛들이 예수님에게 흡수되었습니다. 작은 촛불 하나에도 물러가는 어두움은 예수님의 빛 앞에선 당연히 맥을 못 출 수밖에 없습니다.

  

필립 얀시의 책 ‘단단한 진리’를 읽다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으셨으나, 단 한번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와 이 여인을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고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몸을 수그리시고 땅에다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그 살기와 분노와 공포와 절망과 수치가 얽히고설킨 긴박한 시간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는 이에 대한 논평을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은 일종의 시를 쓰신 것이다. 시는 일정한 틀이 없다. 무엇인가를 쓰시면서 여백으로 시선을 유도하셨다. 관심을 분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예수님께 집중하게 하셨다.”

  

너도 나도 뭔가를 써서 남기려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집중시키시며 동시에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셨던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빛이시며 동시에 영원한 공간과 시간이신 예수님께 집중할 때, 분노도 살기도 적대감도 공포도 절망도 수치도 우월감도 조용히 고개를 떨구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라.”(요 12:37)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무진 애를 쓰셨는데, 결과는 제로라는 것입니다. 이 무섭고도 허무한 결론은 그러나 사실입니다. 그 원인을 사도 요한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하는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요 12:39)

   

이를 두고 ‘하나님의 유기(遺棄)’라고 합니다. 유기란 내버려 둔다는 뜻입니다. 이 하나님의 유기야말로 가장 무서운 벌입니다.

  

윌리암 톰슨은 그의 책, “타락한 몸에 빛이 내리는 순간”에서, 하나님 입장이 되어 우리들에게 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나의 형상을 가진, 자유로운 존재를 만들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악이 이 세상을 찾아오는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데, 그들이 그 자유를 갖고 나를 사랑할까? 자발적으로 선한 일에 동참할까?”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냉정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최고의 선물 자유의지를 오용하고 남용하였다면 하나님께 남은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유의지를 회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의지를 박탈하면 인간들은 로봇이 되어버립니다. 둘째는 인간이 원하는 바를 다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원하는 바이지만, 그런데 그렇게 해주신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오래 참으심’이며 그분의 가슴 아픈 유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는 여러 종류의 삶을 사도 바울이 열거합니다. 첫째, ‘진리를 불의로 가로막은 자들’(롬 1:18) 둘째,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영광을 돌리지도 않는 사람들’(롬 1:21) 셋째, ‘우상숭배로 전락한 삶’(롬 1:23) 넷째, ‘정욕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롬 1:24) 다섯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롬 1:28)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자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어느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마음을 헤아리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아브라함 헤셀의 말입니다. “어째서 정의롭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악이 존속하도록 허용하시는가 라는 문제는,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그분의 공의와 사랑이 드러나게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 모두를 침묵시키는 지적을 합니다.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3) 정말 통렬하기 짝이 없는 지적입니다.

  

‘예수님을 저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아니하는 자’(요 12:47-48)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감사함으로 온전히 받습니다.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 가르침을 모두 지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 말씀 따라 살려고 애를 쓰는 것만으로도 예수님께서는 대견해 하시고 도와주십니다. 바로 그 마음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 마음 위에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완성시키십니다.


'좋은 말씀 > 신우인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대와 함께라면  (0) 2016.05.08
예수님의 가장 큰 마지막 선물  (0) 2016.05.07
한 알의 밀이 죽을 때   (0) 2016.05.04
다시 쓰는 종려주일   (0) 2016.05.03
정당한 의도마저 버릴 때  (0) 2016.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