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 엿새 전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과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사람들은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나드가 담긴 옥합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는 자신의 긴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 그 광경을 바라보았고 나드 향내는 온 집안에 퍼져나갔습니다. 한 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마리아의 행동에 놀란 것입니다. 그 때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이 말을 한 사람은 며칠 후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팔 가룟 유다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나드 향유 한 근의 가격은 일반 노동자의 1년 치 품삯에 해당되는 큰 액수입니다. 일곱 귀신 들린 거리의 여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난 후, 구원을 받고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구원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 이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사역을 돕는 가장 고귀한 여인으로 변신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만나주신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귀한 손님이 오면 주인은 향유를 한 방울씩 손이나 옷에 떨어뜨려 땀 냄새를 없애주는 것이 당시의 예의이고 관습이었는데, 그 여인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예수님의 온 몸에 온 정성을 다해 발라드렸습니다. 이는 예수님께 올린 ‘최상이요 최고의 감사’입니다. 그 감사에는 어떤 의도나 바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이 그저 눈물겹도록 고맙고 감사하여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그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깊고 깊은 예수님의 뜻이나 그 여인의 깊은 감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은 슬픈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들 중 가장 똑똑하고 유능하였습니다. 그는 열혈당원인데,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그분을 모시고 독립을 쟁취하자는 부동의 목적을 갖고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의 뜻은 옳고 가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예수님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엄청난 신적 능력이 있음에도 로마를 무력으로 무너뜨릴 생각조차 없으셨습니다. 실망은 불만이 되고, 불만은 마침내 예수님을 제거하는 데까지 간 것입니다.
기복신앙이 그 열심에도 불구하고 딱하고 슬픈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로 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자신 쪽으로 끌어오려고 몸부림을 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을 어려움에 방치하시는 것 같아 하나님께 실망을 합니다. 불의와 악이 판치는 이 세상을 방관하시는 것 같아 하나님이 불만스럽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흔들리고 최악의 경우 하나님께 등을 돌려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엘리 위젤은 열다섯의 어린나이에 죽음의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훗날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그 지옥에 대한 증언을 수많은 글로 남깁니다. 엘리 위젤은, 한 어린이가 어른들의 무기은닉을 도왔다는 이유로 고문 받고 처형당하는 참혹한 모습을 보고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버립니다. 반면 미국의 로저 보울린은 고등학생으로, 해상 수색 구조대에서 자원봉사를 합니다. 주말만 되면 로저와 그의 동료들은 가슴이 미어지는 비참한 일들을 겪곤 합니다. 참혹하게 살해된 시신도 여러 번 목격하였는데, 그 중에는 안면이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의 부조리와 사악함을 수없이 목격한 로저 보울린이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죽음과 비극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끔찍해서일까요? 그저 날씨나 옷이나 야구경기에 대한 이야기나 하면서 편안히 지내려고만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 죽음이나 하나님의 존재와 개입에 대해서, 말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로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사악함으로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엘리 위젤이 로저 보울린보다 더 끔찍한 일을 당해서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한다면 그 또한 정말 슬픈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우리 모두 다 각각의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마저 내 생각으로 관철시키고 가르치려고 듭니다. 그것이 바로 고집이고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입니다. 체코 전 대통령 하벨이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잃으면 자신과 모든 사물의 위치를 정해주는 절대적인 좌표를 상실합니다. 상대적인 가치와 그 좌표에 자신을 맞추다 보면, 필연적으로 인간의 존재도 서서히 분열되고 그가 속한 세계도 괴멸될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빠지며 자초하는 분열과 괴멸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일’입니다. 회개(‘메타노이아’)는 ‘돌아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아무리 정당하여도 하나님의 생각과 충돌하면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각자의 상대적 가치들이 충돌하고 폭발하여 갈등과 불행이 양산되는 세상에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보여주신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막 14:9) 마리아의 예수님을 향한 깊고 깊은 사랑과 헌신을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전도나 선교의 도구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더 원초적인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름의 개성을 가진 독특한 존재들입니다. 그 위에 마리아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아낌없는 헌신의 이야기가 들려집니다. 복음서의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우리를 그 이야기 속으로 초대하여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는 또 다른 자신만의 사랑과 헌신의 이야기를 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온 집안에 향내가 가득하더라.”…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헌신이야말로 최고의 삶을 누리고 베푸는 최상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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