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 교회에 유대주의자들로 인해 문제가 생겼습니다. 초대 교회를 흔드는 두 개의 잘못된 사상이 있었는데 유대주의와 영지주의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사상에 대해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라고 말할 정도로 단호하고 강경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율법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율법으로 복음을 가두었습니다. 또한 영지주의자들은 헬라철학으로 복음을 다시 해석한 사람들입니다.
비단 율법이나 헬라철학으로만 예수님의 복음을 가두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생각이나 이념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가두는 경우는 끝도 없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과 태도로 복음을 가두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복음을 가둘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내 생각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생각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내 안에서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들의 다양성이 어우러져 서로 보완하며 서로 도우며 아름다운 가정,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사회가 됩니다.
옥에 갇힌 바울은 빌립보 교회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을 빌립보 교회로 보냅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자식이 아비에게 함과 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한”(빌 2:22) 사람이라고 하였고,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빌 2:20)고 하였습니다.
또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빌 3:25)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나름의 의도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올바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것이 모든 삶의 기초가 됩니다.
‘죄’를 헬라어로 ‘하마르티아’라고 하는데, 그 원뜻은 “과녁에서 빗나가다.”입니다.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뜻이 곧 우리가 향해야 하는 과녁입니다. 그 과녁에서 빗나간 모든 것이 곧 죄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열심히 그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함으로써 전혀 엉뚱한 방향, 때로는 정반대 방향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우리가 봐야 하는 본질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과 의도대로 세상은 움직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과 의도는 언제나 ‘사랑’과 ‘창조’입니다. 즉 생명을 살리고 더욱 풍성케 하는 것입니다.
둘째, 세상이 아무리 예측할 수 없이 흐른다고 해도, 그 원인은 언제나 인간의 탐욕입니다. 인간은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므로 작은 것 같으나 큰 영향을 미칩니다. 좋은 의도를 가지면 좋은 영향을, 나쁜 의도를 가지면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더욱 풍성케 하시는 예수님께서, 죽는 일에 몰두하는 줄도 몰랐던 바울 자신을 불러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오직 살 길인 예수님과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중입니다. 감옥에 갇힌 것도, 빌립보 교회에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 소란케 하고 교인들 간에 불화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는 것도,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과 세력을 유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살 길인 하나님의 뜻을 바로 세워 빌립보 교인들로 하여금 제대로 올바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도 사도 바울과 같습니다. 곧 예수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헬라어로 “에일리크리네이스”인 진실은 ‘완전무결한 태양빛으로 시험하다’입니다. 이 혼란스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이겨내야 하나? 경쟁력, 외모, 재산과 배경, 학벌, 정직과 성실, 통찰력, 재능, 의지력, 용기 등등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진실’이 최고의 병기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완전무결한 빛 아래서, “나는 왜 이것을 원하며, 어떤 의도로 이 일을 하는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 어떤 의도와 목적도 예수님의 완전무결한 빛 아래에선 밝히 드러납니다.
모든 사람들이 상대방에 대해서 “그대는 진실한가?”를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나를 향해 “너는 진실한가?”를 물으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은 과연 진실한가?”를 묻습니다. 이 질문은, 다른 말로 하면 “그대는 나를 사랑하는가?”입니다.
하나님을 ‘진짜로’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진짜로’ 사랑할 때 비로소 진실할 수 있습니다. 진실할 때만이 나는 살아나고 사람들을 살려냅니다. 진실할 때만 자신의 주장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의 다름을 인정하며 더불어, 함께 하나님께서 가라하시는 곳을 향하여 갈 수 있습니다.
드디어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서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동의를 한 것입니다. 그 일에 초점을 맞추면 하나님께서 먹이십니다. 그것도 베풀고도 넘칠 만큼, 너무나 충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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