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우리는 왜 기쁘지 않은가?

새벽지기1 2016. 4. 4. 15:56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도리어’입니다. ‘역전’을 뜻하는 ‘도리어’의 의미는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시각을 가질 때 깨닫게 되고, 그 때부터 고난과 죽음은 전혀 무섭지 않게 되며,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물 흐르듯 살게 됩니다.

   

로마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사도바울의 ‘나의 당한 일’은 감옥에 갇힌 것만이 아닙니다. 감옥에 수감되기까지의 전체 일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로마당국에 넘겨지고 그 이후 로마로 압송되기까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곤혹을 치릅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고후 11:24-25) 이렇게 당한 일들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복음의 진보는, 복음을 더 많이 전했다는 뜻도 있으나, 사도 바울 자신의 더욱 굳건해진 믿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사는 데는 반드시 고난과 실패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회는 성공만을 강조하고 사람들은 성공과 안녕만을 원합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과 억울함으로 인해 소중한 생명을 엉망으로 만듭니다. 참 신앙이란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 곧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고난 없이는 성장도 없습니다.

   

‘체스터턴’은 말합니다. “장기적인 목적에서 볼 때 성공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불리한 것은 없다. 성공처럼 실패인 것은 없다.” 성공이 실패인 것은 성공으로 인해, 우리가 가야할 더 깊고 넓은 영역을 건너뛰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실패가 재앙이 아닌 것은 우리를 새로운 깊이와 하나님 은혜의 새로운 지평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과 실패를 피하지 않고, ‘도리어’ 대면하고 견디고 이겨냈습니다. 초대교인들의 별명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해 원하시는 자녀로서의 당당함입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는 큰 파장을 일으킵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빌 1:14)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중략)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빌1:15-17) 이런 저런 소식을 들은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기쁨의 원천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확립한 분명한 목표입니다. 그 목표는 첫째, 복음전파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이웃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당한 일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알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과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중요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사람의 성실하고 경건한 삶의 파장은 작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사도바울에 의한 복음전파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에서 예수님만 존귀하게 된다면, 죽어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그렇다면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도 예수님과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파의 목적은 오직 하나! 어떤 사람이든지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이유는 전도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자신들만의 세력 확장 때문입니다. 이제 복음과 전도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내 안에서 예수님이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작가 이서진씨는 소설 “강변에 서다”로 심훈 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서진 씨는 전신마비 장애인입니다. 25년 전, 20세 꽃다운 나이에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이 마비되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고 식음을 전폐하며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혹여 딸이 들을까, 소리 죽여 밤 새 우시는 어머니를 보고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이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몇 달을 궁리하다가 시작한 것이 독서였습니다. 입원해 있던 2년 반 동안 하루 15시간 씩 죽기 살기로 책을 읽었습니다. 그 생활은 퇴원해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바깥세상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PC 통신입니다. 그녀의 글을 읽고 한 남자가 관심을 보였고, 만나자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전신 마비 장애인임을 밝히며 거절했습니다. 그 남자는 끈질겼습니다. 영화 같은 사랑 끝에 이현수 씨와 결혼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격려에 힘입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어느 덧 전업 작가로 신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입에 문 나무 막대로 글을 씁니다.

   

이서진 씨 안에서 문학이 존귀하게 되었고, 나아가서 문학 안에서 이서진 씨가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서 예수님께서 존귀하게 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자신의 생각, 바램, 소원은 다 버리고, 예수님의 생각과 소원을 자신의 것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최우선 순위는, 전도나 교회성장이 아니라, 우리가 변화되어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 것이 되어,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삶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살려고 출발하면, 어려움을 능히 이기고도 남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격려와 지원이 무한정 공급됩니다.

   

독일이 분단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카스너 메르켈 목사는 부유한 서독 출신입니다. 그런데 공산국가 동독에 목회자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기꺼이 가족들과 함께 가난한 동독으로 갑니다. 경직되고 왜곡된 공산치하에서도 예수님 정신으로 자녀들을 키웁니다. 통일 된 후에도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을 멸시합니다. 그런데 동독에서 교육을 받은 메르켈 목사의 딸은 동독인과 여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통일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앙겔라 메르켈입니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10년 동안, 중환자 같았던 독일 경제를 되살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현재 누구보다도 독일을 올바로 잘 이끌고 있습니다.

   

상황에 짓눌려 주저앉고, 욕심과 비본질에 생명을 허비하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간절한 간구를 들으십시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존귀하게 되고,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존귀하게 되며,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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