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를 마친 후 목사님이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아주 가끔씩 교회에 오는 청년이 보였습니다. “오랜만이군. 하나님의 충성스런 군사가 돼야지.” 그 말에 청년이 대답합니다. “저는 이미 하나님의 군사인데요.” “그런데 왜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때나 볼 수 있지?” 그러자 청년이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특수부대 비밀요원입니다.”
하나님의 군사 가운데 최고의 군사는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전 세계로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요원 중의 요원입니다. 신약성경 27권 중 사도 바울이 쓴 것은 13권이나 됩니다. 그 중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옥중서신입니다. 감옥에 갇히면 기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편지에는 기쁨이 넘칩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와 회심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문제의 해답이 왜 삼위일체 하나님인가를 명확히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형통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회심 후의 바울은 하나님의 평강과 자유와 기쁨과 능력과 영광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진수를 알려줍니다. 당시 그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무위로 돌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세상의 질서를 깨뜨린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종교란 특정 행위들을 행하여 자신이 섬기는 신을 만족시켜 복을 받으려는 일체의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도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하여 각종 종교행위에 몰두합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열심히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잘 알았기에 그 추종자들을 잡으러 다닌 것입니다. 바울은 종교적 과업에 바빴고, 종교 유산과 식견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데 바빴습니다. 현재 우리들은 생업에 바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없다면 종교보다는 차라리 생업에 바쁜 편이 나을 수 있습니다. 종교는 절대를 표방하기에 가장 사악하고 무자비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바울을 다메섹에서 만나신 이유,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도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그 바쁜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열심에 불탔고 여러 특권을 누렸던 과거의 바울은 분노에 차있었고, 특권을 버리고 매 맞고 감옥에 갇힌 현재의 바울은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바울이 보고 깨닫고 소유한 것, 그것이 내게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예수님께서 모든 것의 해답이 되는지의 여부가 결정됩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요?
유진 피터슨은 그의 책 ‘자유’에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울에게 한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들어라 바울아. 너는 잘못 알고 있다. 너의 훌륭한 지식과 명석한 신학과 탁월한 성실은 나무랄 데가 없다. 하지만 너는 종교란 무언가를 알고 행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종교란 하나님이 너를 위해 무언가를 하시도록 하는 것, 너를 사랑하시도록 하는 것, 너를 구원하시도록 하는 것, 네게 복 주시도록 하는 것, 네게 명령을 내리시도록 하는 것이다. 네가 할 일은 보고 믿고 기도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먼저 나는 예수 안에서 나 자신을 너에게 보여 주려 한다. 예수 안에서 너는 내 관심사가 너와 함께 거하는 것이고 너를 온전하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중심이 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최대 오류입니다. 아무리 정당해도, 아무리 다른 사람들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자신의 생각, 감정이 중심이 되면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깨달은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중심이 되시도록 하는 것이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서 일하시는 데 동의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렸습니다. 그러자 조급한 발걸음과 부글부글 끓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예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이 일 역시 예수님의 결정이기에 순종하고 기뻐합니다.
그런 사도 바울을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세우신 열매가 곧 빌립보 교회입니다. 회심 후 사도 바울이 원한 것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의 생각과 마음을 읽고 주인 대신에 행하는 존재입니다. 신실한 종일수록 주인의 일을 더욱 많이 하게 됩니다. 그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빌 1:3)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만난 것을 감사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빨아들였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 1:5)고 밝히고 있습니다.
삶이 불행한 이유를 심리학자 알버트 엘리스는 ‘해야 한다 삼총사’라는 이름으로 설명합니다. “나는 성공해야 하고, 누구나 내게 잘 대해 줘야 하고 세상은 반드시 살기 쉬워야 한다.” 우리들이 외롭고 화나는 이유는 사람과 세상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이용할 수단으로 봅니다. 예수님도 복 받는 수단으로 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을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너무나 사랑하고 걱정하면 애간장이 녹고 창자가 끊어집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걱정하고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의 그 마음으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대했습니다.
복음 안에서의 교제는 이런 것입니다. 공동체와 사람들을 수단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조종하고 통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생명을 살리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애를 씁니다. 그래서 공동체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을 말합니다.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만 두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고난도 참아내신 주님을 생각하며 내 마음을 주님께 몰아갑니다. 그리할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최고의 복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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