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함이니

새벽지기1 2016. 4. 5. 21:58


죽음은 가장 두려운 것인 동시에 낯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은 세상에서의 끝이고, 죽음 이후 어떤 일이 생길지 전혀 모르며, 홀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과오와 불행은 바로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일어난 결과들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죽음의 공포가 인간들의 사고와 사물의 본질을 왜곡시켜 엉뚱하게 반응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 땅에서의 삶을 제대로 살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놀라운 말을 합니다. “내가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니라.”(빌 1:23-24) 사도 바울은 삶보다도 죽음이 훨씬 더 좋다는 것입니다. 죽어서 예수님과 함께 영으로 거하는 것이 자신의 최고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죽음의 실체를 올바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단순한 뜻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50여 년 전부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에 의해 시작된 ‘죽음학’이 죽음 이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죽음을 연구하는 제프리 롱, 미구엘 루이스, 텍사스 의대 심장수술 최고 권위자 스미스 교수 등이 스스로 경험하고 조사 연구한 죽음의 사례들에는 뚜렷한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심장과 숨이 멎은 후, 유체를 이탈하여 자신을 내려다보았고, 갑자기 어둡고 긴 터널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으며, 이어서 너무나 밝고 환한 빛 가운데 서서, 자신의 과거를 보았고, 그에 대해 한없이 부끄러웠으나, 그 빛은 자신을 연민과 동정과 사랑으로 용납하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하나 같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곳을 떠나서 다시 몸으로 돌아왔는데, 마치 더러운 옷을 입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죽음에 대한 연구와 서술들은 성경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경험과도 일치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에 대한 인식의 결정적 전환점은 스데반의 순교였습니다. 이 사건은 바울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현장에 있던 무리들을 위하여 기도하던 스데반의 평온한 얼굴이 그의 뇌리에 깊숙이 박혔고, 무엇이 그로 하여금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었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핍박하는 자신마저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스데반의 그 평온했던 얼굴의 실체를 온전히 깨닫게 되었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체험한 매우 특이하고 신비한 현상을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중략) 십 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1-2, 4)

   

사도 바울이 가봤다는 셋째 하늘은 어디였을까요? 이는 유대인들의 개념으로, 하늘은 여러 개로 나뉘어 있고 그 중 셋째 하늘은 의롭게 죽은 사람들이 머무는 장소라고 합니다. “내리셨던 그(예수)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4:10) 이 말씀에서 “모든 하늘 위”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머물고 계시는 하늘을 의미하며, 사도 바울이 그 곳을 다녀온 것입니다.

   

2년 동안 천국과 영계를 넘나들었다는 스베덴보리의 책을 읽어보면 천국이건 지옥이건 여러 층으로 나뉘어있다고 합니다. 죽은 후, 시공을 넘나들 수 있게 된 모든 영들은 자신이 가장 편하게 거할 곳을 찾아가 같은 종류의 영들끼리 모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계층들이 생겨납니다. 악한 사람들만이 모여 세상에서 하던 대로 악한 일을 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달리 선한 일을 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입고 사는 이 세상은 육신을 벗고 가는 죽음너머의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육신은 껍데기이고, 영은 기억과 생각을 보존하며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몸 안’과 ‘몸 밖’을 구별했던 것은 “유체 이탈”, 곧 육신과 영혼의 분리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몸’을 ‘장막’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고후 5:1-2)

   

사도 바울에게만 특별히 죽음에 대한 자유가 주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도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죽음의 실체를 올바로 알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 복음에 합당한 삶은 첫째,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욕심을 버리고 정직과 성실로 열심히 돈을 버십시오. 그리고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이웃을 살리는 일에 힘을 모으십시오. 둘째,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털끝하나도 손상을 입히지 못합니다. 다만 미혹하여 스스로 올무에 빠지게 하고 남을 해하게 만듭니다. 사탄의 궤계를 정확히 아십시오.

   

우리들은, 죽음너머의 세계도 사랑으로 관장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고, 진리를 알아 죽음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며, 이 땅에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매진하여, 백배의 결실을 맺고, 모두 다 셋째 하늘에서 만나 예수님과 영생복락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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