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이드 존스

[스크랩] 비교적 짧은 설교한편 입니다.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1. 14. 05:24
 


은혜의 기적(왕하 4:6)




열왕기하 4:1-7에 기록된 기름병과 과부에 관한 기사를 놓고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함께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주제에 신약이 아닌 구약 성경의 본문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신약 성경이 구약 성경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메시지를 담고

있긴 하지만, 신약에서는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며, 또한 동일한 메시지가 구약 성경보다 더욱

풍성한 다른 형태로 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본다면, 신약 성경의 본질을 더욱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구약

성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점이 많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진리를 대개 회화 형식으로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만일 신약

성경의 관점을 가지고 구약 성경을 본다면 매우 명확한 형태의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서두에서 나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문제를 다루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먼저 말씀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넘어가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그 하나의 교리만으로

기독교 전체를 확인하려 드는 경향을 지니곤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기독교가 단지 죄사함을 선포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먼저 이 죄사함이라는 원초적인 교리가 있음을 감사해야 하는

것은 만약 이것이 없었다면 우리 모두는 파멸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죄의

교리가 기독교의 전부라고 생각하거나, 기독교의 위대하고 영원한 진리가 단지 사람을 형벌과 고통으로

부터 구해주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을 금하고 계십니다. 기독교는 죄사함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훨씬 더 심오한 무한대의 진리를 우리에게 부여해 줍니다.

제가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노력하는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정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존 웨슬레(John Wesley)는, 그의 생애가 마감될 무렵에는 생전에 알고 있던

기독교에 관한 여러 가지 정의들을 인용하기를 좋아했는데, 이들 가운데에서 가장 훌륭했던 것은 17세기

한 스코틀랜드인이 정의한 "기독교란 인간 영혼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생명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에서 과연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언급하는 말들을 보면 위에 주어진 정의보다 저급하기

이를 데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특정한 국가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여겨

기독교 전체 범위를 한정시키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영국 국민들은 자신의 나라를 기독교 국가로

간주합니다. 일부의 정부 관리들을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간주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지배하는 그

나라 사람들을 이교도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간주하는 근거는 단지

자신들이 어떤 종교적인 심오한 경험이나 또는 영적인 사실들에 대한 어떤 관심이라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들이 영국 국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유아세례와 연결시켜서 정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그 사람들에게 왜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가 하고 질문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유아일 띠에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유아세례는 그들이 어린아이여서 실제로 아무

의식이 없을 때에 그들과 그들의 부모님들과 그리고 목사님 사이에서 맺어지는 하나의 관례적인 사건인데,

그들은 그 관례적인 사건이 그들을 그럭저럭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견해가 단지 성공회나 로마 카톨릭 교회 등에만 국한된다는 생각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이 견해는 대부분의 교회들 안에서도 만연되어 있습니다. 유아세례라는 제도는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의

영혼에 들어가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다는 것을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과 혼동하곤 합니다. 어린아이는 자라서 교회의 정식 구성원으로 영입되어 갑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느 정도의 교훈과 지시가 주어지고 모든 문제들에 대처할 만한 기질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교회의 정식 교제의 권리를 갖는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는 신앙 상태에 대한 권고가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유아세례라는 근거에만

기초해서 교회의 교제로 영입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 속에서 활동할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언급은 거의 주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가하면 기독교를 선량한 사업들과 도덕과 선행 등의 용어로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총명한 지혜에 의해 교회의 정식 회원으로 영입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로써 그들의 고백을 부인하곤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정의들을 앞에서 열거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의들이 존 웨슬레가 인용한 정의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은 모두 기독교를 그런 식으로 정의하지만 그 스코틀랜드인은

기독교를 인간의 영혼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우리가 결국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과부와 기름병에 관한 유명한 사건을 통하여 설명하려는 점도 바로

이 정의에 담긴 진리인 것입니다.


만약 기독교가 '하나님의 생명'이라면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며, 또한 그것이 초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단코 도달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그냥 받아 들여야 할

선물입니다. 누구라도 이 점을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성경에 나타난 장면들을 살펴봅시다.

채권자들의 빚 독촉에 시달리는 한 가난한 여인이 여기 있습니다.

그녀의 친구들이 그녀를 위로하고, 도와주고, 그녀의 채권자들을 만나 보려고 하지만 그들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위기 상황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이와 같은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3:1). 가르치는 것은 하나의 일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거대한 군중을 뒤흔들 수 있습니다. 나는 유창하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흡사 천사와도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내적인 생명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소유물을 가난한 사람의 필요를 위해 내어놓는 완전히 비이기적인 사람들에 관해서도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틀림없이 영적으로 올바른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에는 사랑이 결여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자비심도 기독교의 본질인 이 생명을 반드시 창출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사람의 생명을

준다고 해도 생명이라고 불리는 성령의 원초적인 열매를 생산해 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기적입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생명입니다. 사람이 쏟을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이 가해진다 해도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


자신의 노력으로 이런 생명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이 생명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은 또한 이 생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열왕기하의 과부가 사는 그 마을을 잠깐 방문해 보도록

하십시다. 어느 날 아침 열 시경에 그 마을중심에 잇는 광장으로 찾아가 봅시다. 거기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한 번 살펴봅시다. 그들은 서로 만나서 그 가난한 과부의 형편을 이야기하면서 근심하며

걱정하지만 소망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아침의 장면입니다만, 바로 동일한 장소에서의 오후에는 동일한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는데,

이때에는 그들의 얼굴에서 생기가 돕니다. 그 사람들은 과부가 빚을 갚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여분의

돈도 충분히 가지게 되었다는 소식을 막 전해들은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었을까요?

아침에 보아서는 정말 소망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들이 그녀와 함께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진리가 구약에 동일하게 나타난 모습입니다. 니고데모가 우리 주님과 나눈 한밤의 대화에서

이런 경우를 또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주목해 왔습니다"하고 니고데모가

그리스도께 말합니다. "선생님께서 행하신 이적들도 보아왔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도 들어 왔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평범한 분이 아니심을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비결을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의 선생입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선생님께서 도달한 그 표준까지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니고데모야"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의 질문 속에 네 자신이 드러나 보이는구나. 너는 내가 말하는 이

생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틀림없구나. 너에게 필요한 것은 진전이 아니라 중생이다.

너도 역시 그릇된 무리에 속해 있단다. 너는 거듭나야만 된다. 내가 말하는 하나님의 생명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바람이라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너는 바람을 볼 수는 없지만 그 느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는 고개를 숙이고는 바람이 그 생쾌한 촉감으로 네 머리 위를 불어 가도록 하지 않느냐? 그것은 이해할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일 문제란다."


바울은 이 진리를 고린도전서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2:14).


이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 이 생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이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조차도 이 생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과부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마을 사람들도 그

소식을 듣고 놀랐지만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바로 그 여자 자신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녀가 끊임없이 채워지는 기름을 보고 놀라워하면서 손에 기름병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봅니다.


바울 역시 이와 동일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나도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다소 사람 사울이지만, 이제 더 이상 나는 사울이 아니다"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영혼 안으로 들어 올 때에 그리스도인 자신의 놀라움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이 생명의 신적인 본질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생명을 하사받는 데에 있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점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고는 그저 앉아서

이 기적적인 생명이 자기 영혼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밖에 없다는 말씀인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웅대한 연극에 오직 한 배우만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 분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는 최소한 그 분을 위하여

무대를 예비할 수는 있습니다.


근심 중에 있던 그 가난한 과부는 선지자에게 가서 도움을 구했습니다.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왕하4:2) 하고 선지자가 말했습니다.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하며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좋다. 좋다." 선지자가 말합니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리고는 선지자가

그녀에게 지시합니다. 우선 그녀는 그녀의 아들과 둘이서 방안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기적은 마을 한 가운데서가 아니라 비밀스러운 방안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군중들이 몰려 있는 시장이나 번잡한 거리에서 행하시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생명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한 걸음 물러 가 하나님께서 머물 수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요즘과 같이 분방한 세상에서 우리는 홀로 거할 수 있는 장소를

가져야만 합니다. 세상을 우리로부터 차단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 자신을 우리들 속으로

침잠시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내면의 방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문을 닫아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만 함께 있으십시오.

영원한 것들과 함께 거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선지자가 여인에게 두 번째로 시킨 일은 기름을 받을 만한

그릇들을 모아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단지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최고의 복들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주일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히 바라지 않는 상태가 대부분이며 심지어는

축복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중생이라는 기적과 회심의

은혜와는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 심리학의 교훈을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회심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한, 회심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빈 그릇들을 모으십시오.

이 축복이 여러분을 위한 복임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기대에 차 부푼 가슴을 안고 예배에 참석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을 받을 준비를 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세상적인 고정관념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십시오.


선택


마지막으로, 우리가 받을 축복의 양은 전적으로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만일 축복의 양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면 문자 그대로 무한할 것입니다.

과부가 선지자에게 한 병의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자 선지자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밖에 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왕하4:3). 여기 저기서 하나만 빌어 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녀가 구할 수 있는 한 많은 그릇들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무한하고 영원한 대양과도 같습니다.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는 자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위대한 복이 결여된 형식적이고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었던가를 고백했습니다.

무디는 이것을 사모하였고, 이것을 위해 자신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복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그가 뉴욕시의 거리를 걷고 있을 때에 갑자기 이 복이 그에게로 왔습니다. 그 능력이

너무나도 그를 압도했기 때문에 무디는 죽을 것 같아서 손을 들고 소리쳤습니다. "주님, 그만 하소서!"


나는 기름을 받는 빈 그릇들의 행렬을 볼 수 있습니다.

여인이 다른 그릇을 달라고 하고 다른 그릇이 더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자 "기름이 곧 그쳤"(왕하4:6)

습니다. 그들에게 더 받을 그릇들이 있는 동안은 기름이 계속해서 흘러 넘칠 것입니다.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왕자들로 삼으려고 하시는데도, 거지들로서 살아가는

것을 만족해하다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비극이란 말입니까! 이 신비스러운 경험, 즉 하나님의 충만케

하심은 바울과 초대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무엇이 아닙니다. 이것은 평범한 인간들이 역사를 거슬러

오면서 받아온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바로 이곳에서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출처 : 로뎀나무
글쓴이 : 어린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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