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 미국 남부는 흑백간의 인종분규로 엄청난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그때까지 모든 공공 장소, 버스나 기차까지도 백인과 흑인이 타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학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연방정부에서 법적으로는 흑백간의 평등을 명시하였지만 백인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에 의해 수많은 흑인들이 죽었습니다.
로버트 콜스 박사는 소요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인 미시시피 한 초등학교를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여섯 살짜리 흑인 소녀 루비 브리지를 처음 만났습니다. 루비는 프란츠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 흑인 아이였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백인들 학부모와 교사와 학생, 시민들까지 합세한 무서운 저항이 일어났습니다. 백인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등교시키지 않았습니다. 루비는 연방 보안관의 경호를 받으며 등교하였는데, 미시시피 경찰이 신변보호를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백인들이 학교 앞에 모여 데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욕설과 위협,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계란들. 그 한 가운데를 어린 루비가 매일 아침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선생조차도 오지 않는 학교 교실에 들어가서 혼자 있다가 학교를 마치는 시간이 되면 돌아왔습니다.
스트레스가 어린이들에게 미치는 연구를 하고 있던 콜스 박사는, 루비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연구 대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루비네 가족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였을 때, 가족들은 강한 경계심을 보였습니다. 콜스 박사가 그 마을에 들어온 최초의 백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간신히 루비네 가족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루비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어린 꼬마가 그 무서운 상황을 이겨내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성난 군중들의 위협 앞에서 어떻게 매일 등교하고 홀로 몇 시간이고 앉았다가 돌아올 수 있을까? 그 상황에서 루비와 같은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수많은 질문을 가지고 여러 날에 걸쳐 인터뷰하는 동안 콜스 박사는 어린 루비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흑인 꼬마 소녀 루비는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라도 한 것처럼 콜스 박사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셨잖아요.” 루비가 했던 단 하나는 바로 기도였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강하고 담대하게 해달라고, 자신을 위협하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는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로버트 콜스 박사는 루비와의 만남을 계기로 혼란스러웠던 과거를 정리하고 평생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를 찾았습니다. 그 이후 콜스 박사는 15년 동안 흑인들, 가난한 노동자들, 소외되고 박탈당한 사람들의 아이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위기의 아이들” 시리즈 네 권을 출간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불공평한 인생에 대하여 어떤 해답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렇게 태어난 탓에 고통과 빈곤의 악순환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왜 이런 일들이 나에게 생기는 것일까 고민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날, 그날을 살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예수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콜스 박사는 위기의 아이들 시리즈의 완결편으로 “미국의 부유층과 부호들”을 출간하였는데, 부자들과 인터뷰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수많은 가식과 교묘한 장애물들로 가득 차있었기 때문입니다.
플로리다의 한 부잣집 아이는 주일 학교에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들께 그 내용을 질문하였습니다. 그 질문이 부자 부모의 마음을 찔렀고, 그 부모는 아이를 교회에 다니지 못하게 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였습니다. 콜스 박사는 부자들 안에 숨겨진 권태감과 소외감과 타락을 산더미처럼 찾아냈고, 그 원인은 예수님이 설자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키 위해 이스라엘 왕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하나님도 이스라엘도 안중에 없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위와 권한을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그의 안에는 하나님께서 설자리가 없었습니다.
현재 나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이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만약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이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 내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는 뜻이며, 그렇다면 내 인생은 온갖 것에 휘둘리다 소멸해 버립니다. 사울 왕처럼.
또한 하나님을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존재로 보는 한,
내가 섬기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 자신입니다. 사울 왕처럼.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중요한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한번 버리겠다면 끝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처럼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분이 아니라, 분명한 원칙이 있고, 그 원칙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원칙에 집중해야 합니다.
피터 크리프트 박사는 그의 책 ‘예수 충격’에서, “예수님은 우리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라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하시겠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음 말을 들으십시오. “우리의 문제는 그 분의 임무요 기회입니다. 그 분의 가르침이며 우리의 배움이며 그 분의 뜻이며 우리의 성화입니다. 그 문제의 끝을 그분이 잡고 계십니다.” 깊이 생각해야 하는 말입니다.
내가 있습니다. 내가 해결해야 하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문제의 열쇠입니다. 그런데 예배와 기도와 간구로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만 합니다. 여기에 큰 오류가 있습니다. 그래서는 나와 내 문제와 예수님은 삼각구도를 이루며 서로 바라만 볼 뿐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라는 만능열쇠를 들고 내 문제를 직접 열어야 합니다.
삼각형이 아니라, ‘나-예수님-내 문제’의 순서에 따라 일직선으로 놓아야 합니다.
흑인 꼬마 루비를 기억하십시오. 여섯 살의 꼬마 앞에 백인 어른들의 무시무시한 저항이 있습니다. 어른들조차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문제입니다. 그러나 꼬마들이 그 저항을 뚫고 앞으로 나갑니다. 그 저항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처럼 행동했습니다. 즉 루비-예수님-문제의 순서로 놓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동행하였습니다.
나-예수님-내 문제를 일직선에 놓는다는 것은,
첫째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해 보고,
둘째 예수님처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높아지려고, 강해지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남들을 살리려고만 하셨습니다. 대적자들을 용서하셨고, 고난은 당하셨습니다. 변명도, 책임을 전가하지 않으셨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빌 2:9)
우리들이 예수님처럼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을 높이신 똑같은 원칙을 적용하십니다. 그에게 어떤 일이든 감당할 용기와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빌 2;11) 이것이 변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원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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