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대적하고 거역하는 모든 인간을 순식간에 다 날려버리실 수 있습니다.
교만을 죄로 여기시는 데는 하나님의 나와 모든 인간을 향한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이를 깨닫는 것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내 자녀가 자신이 가장 잘난 줄 안다고 합시다. 도도하고 거만하고 세상을 우습게 본다고 합시다. 가만 놔둘 부모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랬다가는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없고, 내 자녀가 형편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자기 개발과 성장을 하지 못하게 하고, 쓸데없는 만 가지를 하게 합니다.
성경은 교만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가장 높은 구름 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3-14)
뭇 사람 위에 자신의 보좌를 높이겠다는 생각은 모든 사람들을 없애야 할 경쟁자로 보게 합니다. 자연히 상대를 누르기 위한 암투와 권모와 술수에 골몰합니다. 강자 쪽에 줄을 대느라 원칙이고 윤리고 따질 시간이 없습니다. 힘이 약하면 친한 척하며 기회를 노립니다. 진실성은 사라지고 거짓 웃음만 남습니다. 거짓 웃음처럼 자신을 피곤하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에너지는 비교하고 경쟁하고 방어하고 샘내고 질투하고 모함하고 공격하고 억울해 하는데 다 탕진해 버립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과 비기리라는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세웠으니 그의 영혼은 피폐하고 그의 삶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교만처럼 웃기는 것도 없습니다. 자신만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압니다. 가장 웃기는 사람은 종교적으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가장 잘믿는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참견하고 가르치고 징계하고 심판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쫓아다녔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아버립니다. 그래서 성당에 불을 지르고 사찰을 훼손하고 풍어제 반대 데모를 하고 세상을 적대합니다.
사람들은 교만과 낙담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그의 삶은 더욱 복잡해지고 그 인생은 점점 더 가련해 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 11:29)
예수님 당시, 그리스 로마 시대 때 ‘겸손’은 덕목이 아니었습니다. 영어로 겸손은 humble입니다. 그 어원은 땅을 의미하는 humus입니다. 이원론의 그리스 사상에서 하늘은 고귀하고 땅은 천한 것입니다. 그래서 humble는 ‘천하다’, ‘가치 없다.’ ‘비굴하다’는 뜻입니다. 겸손은 약자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겸손이 덕목이 아니므로 당연히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너그러움’은 덕목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강자가 되어 너그러우면 훌륭하다고 하였습니다. 강자가 너그럽지 않으면 그냥 그 뿐입니다. ‘강자의 겸손’은 ‘약자의 너그러움’만큼이나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버린 겸손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이라 하십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 그 마지막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그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 쓰러지신 예수님이 슬퍼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지금 만물을 새롭게 하는 중입니다.”
사울 왕이 이룬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이래 실로 300년 만에 이룩한 승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 왕의 업적에 열광할 때, 그러나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하나님께서는 후회하십니다.
인간의 업적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 사람이 자신을 높인다면
하나님은 후회하시고, 하나님의 후회는 그 사람이 이미 끝난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겸손을 버릴 때 하나님께서는 겸손을 높이십니다. 저주스럽다고 한사코 피하는 십자가를 예수님께서는 감당하십니다.
그 누구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또한 아무도 몰랐던, 나를 새롭게 하고 나아가 만물까지 새롭게 하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래서 성부 여호와와 성자 예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삼상 15:22)
오로지 복을 받겠다고 드리는 제사와 예배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고 드린다면, “사술의 죄” 즉 무당의 죄를 짓게 되고 우상 숭배와 같아집니다. (삼상 15:23)
순종이란,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며, 나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는 것임을 알고 묵묵히 푯대를 향하여 나갈 때, 나는 점점 자라납니다.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처럼 나와 세상을 알게 됩니다. ‘거룩한 성숙’을 이루게 됩니다. 만 가지 쓸데없는 허망한 짓거리로 생명과 시간을 탕진하지 않게 됩니다. 저절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백배의 결실을 누리고 베풀게 됩니다.
세상은 ‘강자의 너그러움’을 칭송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강자의 겸손’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약자의 너그러움’을 칭찬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약자라고 하더라도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내어주고, 속옷을 요구하면 겉옷까지 내어주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까지 가주라고 하십니다.(마태 5:40-41)
강자의 겸손과 약자의 너그러움이 바로 만물을 새롭게 하는 길입니다. 그렇게 사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되리라.”(계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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