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한 달 전 신장이식수술을 받은 김00 집사님 댁에 심방 차 다녀왔습니다. 둘째 아들을 필리핀에 어학연수를 보내고 싶은데 말을 듣지 않는다며 설득시켜 달라고 부탁을 받아서였습니다. 다른 교회에 다니는 분이고 처음 방문하는 집이라 조심스러웠습니다. 얘길 나누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이00이라는 자매가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들었습니다. 예전에 건너편 아파트에 살면서 함께 초보 신앙생활을 하던 분이었고, 지금은 가평에 사는데 8년 만에 갑자기 연락이 되어 수술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20여 일째 병수발을 들고 있다고 했습니다. 두 딸을 잘 길러 사회에 진출시키고, 지금은 혼자 사는 친정 남동생의 9살 된 조카딸을 맡아 양육하고 있는데, 친 딸 키울 때와는 다르게 ‘잘못되면 어쩌나’ 싶어 매우 조심스럽다고 했습니다.
현잰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다시 시작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말씀을 나누던 중에 ‘하나님의 사랑은 강물과 같다’면서 주님의 사랑이 우리 가슴을 적시고 가득차면 또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된다고 말씀드렸을 때, 주체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감정이 폭발한 듯 흘러내리는 눈물을 몇 번이고 훔치면서 자기 아버지 얘길 꺼냈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섬겼는데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신 그 교훈이 자연스럽게 자녀들 삶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며, 이제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 일상이 되었노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주님의 자녀가 되길 축복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위로일 것입니다. 고후1:3b절을 보면,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합니다. 여기서 “모든”(πάσης, 파세스)은 “완전하다”는 뜻도 있지만 그보다는 “풍부하고 충분하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위로”(παρακλήσεως, 파라클레세오스)라는 말은 “충고”, “위안”, “위로”(comfort), “간청”이란 뜻으로, 하나님의 내적 속성인 자비가 외적 행위로 구체화된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로는 단지 심리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환란으로부터 실제적인 구출을 받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고후 1:4-5절은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환란”(θλίφει, 들립세이)이란 말은 “억압”, “상처받은”, “고뇌”, “짐진”, “핍박”, “환란”, “고통”이란 의미이며,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아홉 차례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실존(實存)이 환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가리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바울 자신을 비롯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환란을 당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 부분을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요15:19-20)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택하여 그리스도에게 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소속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규정입니다. 때문에 어디에 속했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에 속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에게 속했느냐에 따라 그의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그리스도처럼 환란과 핍박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염려할 게 없습니다. 이러한 환난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위로하사”(παρακαλῶν, 파라칼론)라는 말은 “가까이서 부르다”, “초청하다”, “안위하다”, “위로하다”라는 뜻의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의 현재 분사형으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중단 없이 계속됨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환난이 연속될 것이지만 그에 상응하여 하나님의 위로하심 또한 계속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실제적 삶 속에서 일상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다가 여러 차례 극심한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의 위로와 함께 하심을 체험했습니다(행 14:19;16:19-26). 때문에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을 환난 가운데서 위로하시는 중요한 목적은 무엇인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할 뿐만 아니라 위로받은 자가 환난에 처한 또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培養)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자신만을 위한 게 아니라 타인을 섬기고 교회의 건덕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벧전4:10).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했던 바울은 이제 그의 지체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고후1:5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τὰ παθήματα τοῦ χριστοῦ, 타 파데마타 투 크리스투)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가 한결같이 받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모든 고난이 다 의미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일 때 의미가 있고 위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닌 무고한 고난이며(눅 22:52,53;23:22-24), 그 고난의 결과 또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메시야적 고난”(헤블레 함마쉬아흐)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이런 고난은 필연적(必然的)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 했고(골 1:8),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롬 8:17). 실제로 바울은 이러한 고난을 셀 수 없을 만큼 당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다가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었고(행 14:19), 빌립보에서는 귀신들린 여종을 낫게 해주었다가 도리어 고소를 당해 매를 맞고 투옥되기도 했으며, 유대인 자객단에 의해 살해당할 뻔한 위험도 겪었습니다(행 23:12-15).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고난에 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하면서, 고난에 비례하는 위로에 대해 자신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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